첨예한 시대정신과 섬세한 역설의 감성
4년 전 어느 봄날. 설렘과 긴장을 가슴에 품고 항해를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상당수는 생의 봉오리를 채 피우지 못한 파릇한 청년들이었다. 항해는 무난히 끝을 맺을 수 있었지만, 영영 돌아오지 못할 여정이 되고 말았다. 그 항해가 세상을 바꿨다. 가장 큰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국가, 사회, 가족, 그리고 나 자신에 이르기까지 많은 걸 되짚어보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 앨범은 재즈 피아니스트 이선지가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수년에 걸쳐 한 자 한 자 적어내린, 우리 스스로에게 바친 헌사이자 감성 어린 고백록이다.
외견상 앨범은 서주, 중주, 후주에 해당하는 세 곡을 꼭짓점으로, 그 사이의 공간을 묵직한 두 개의 모음곡(suite)이 차지한 구성을 갖는다. 현악 앙상블이 큰 역할을 하는 가운데, 피아노 트리오 곡도 적절히 배치돼 있다. 시작과 함께 귀를 사로잡는 강렬한 멜로디의 첫 번째 모음곡은 “4월의 노래”. 후반부의 두 번째 모음곡은 ‘새야 새야’를 모티프로 한 “새의 노래”다. 서주, 중주, 후주라 칭했으나 그 자체로 독자적 이미지를 지닌 세 곡은 ‘고요한 사건’, ‘봄, 블루스’, 그리고 ‘빛의 노래’. 앨범의 말미엔 ‘봄, 블루스’의 또 다른(꽤 인상적인) 테이크가 실려 있다. 2008년에 첫 리더 작을 발표한 이선지의 여섯 번째 앨범, 타이틀은 [Song of April].
[Song of April]은 근년 들어 우리 재즈계가 만들어낸 가장 치밀하고 진지하며 섬세한 앨범이다. 아울러, 재즈에 대해 많은 식견을 갖추지 못했어도 그 아름다움을 간파해낼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감의 폭을 지닌, 보편타당한 가치와 미덕을 겸비했다. 누구나 손쉽게 취할 수 있는 대중성을 운운하는 게 아니다. 이선지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아주 다양한 스펙트럼의 감상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Song of April]의 성과는 단지 음악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무릇 모든 예술 작품은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 이미 창작자의 것이 아니다.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한 ‘고요한 사건’은 서막을 열기에 더없이 좋은 곡이다. 앨범 전체의 지향과 스타일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소재를 연상시키면서도 매우 명료한 이미지를 구축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우리가 사회 속에서 뼈아프게 지켜봤던 많은 일들이 표면과 이면의 부조리로 뒤엉켜있다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아무 일 없는 듯 보였던 수면 위와 달리 바다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급박한 상황들. 분노와 허무에서 출발해 자책의 쓰린 마음을 거친 우리는, 극복과 변화를 위해 굳은 의지와 현실의 힘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두 깨닫지 않았나. 곡의 제목은 소설가 백수린의 작품에서 빌려왔다.
모음곡 “4월의 노래”는,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흐름을 곱씹으며 그려낸 절창(絶唱)의 서사시다. ‘고요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악 앙상블의 연주가, 혹은 이를 활용한 편곡이 큰 역할을 한다. 겹겹이 드리운 현의 울림이 이성의 저울로 작용해 듣는 이의 심미안을 자극한다. 그리고 ‘4월의 노래 1’과 ‘겨울에게’에서 펼쳐진 이선지의 솔로는 처연하다 못해 절박하게 들린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솔로들은 재즈 듣기가 안겨줄 수 있는 가장 짜릿한 예술 체험의 순간을 대변할 것이다. 단지 좋은 연주라는 인식에 머물지 않고, 그 솔로들이 앨범 전체에 있어 매우 유기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흐름과 분위기의 전환을 꾀하는 ‘봄, 블루스’는 들을수록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절묘한 곡이다. 돌이켜 보면 봄은, 우리에게 숱한 갈등을 초래한 계절이었다. 많은 이들이 소망을 노래했다. 때로 그 소망은 철저히 짓밟혔고, 폐허가 된 토지 위에 또 누군가는 꿋꿋이 다른 씨앗을 뿌렸다. 태연히 앉아 발랄하고 경쾌한 봄을 노래할 수 없다는 현실이 어쩌면 예술가들에겐 더 큰 화두를 남기기도 한다.
단 다섯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새야 새야’는 우리 민족의 억눌린 한을 대변하는 노래다. 다만, 누구나 잘 아는 이 멜로디를 어떻게 편곡했는지 관찰하는 데 머물지 않기 바란다. 이선지는 새를, 날아오르고 싶지만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땅 위를 맴돌고 있는 우리 시대의 수많은 영혼들로 치환해 연주에 임했다. 절제된 감성으로 세 번에 걸쳐 변주된 이 모음곡을 마주하며 그 안에 깃든 넓은 공간과 많은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날개가 꺾여버린 새. 너무 오래 날지 못해 날개의 존재를 잊어버린 새. 그리고 나는 것의 가치를 부정한 채 날아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새.
눈에 띄는 것은,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앨범의 결말로 택했다는 점이다. ‘빛의 노래’는 과거나 현재가 아닌 미래를 그린다. 그렇다고 막연히 꿈을 노래하거나 어설픈 화해의 손짓을 띄우진 않는다. 분노가 남았다면 그 근원은 무엇인지, 진정 위로가 필요한 이들은 누구인지, 많은 것이 바뀐 듯해도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임을 잊지 말자고, 힘 있는 목소리로 노래한다. 세월호에서 비롯된 첨예한 시대정신이 무모한 관념에 머물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말하자면 이선지는,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 꾸준히 얘기하고, 나아가 스스로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노래하는 쪽이다. 바로 그 흔들림 없는 태도가 [Song of April]을 완성시켰다.
무대 위의 이선지는 늘 정돈돼 있고 차분해 보인다. 하지만 시간을 갖고 지켜보면, 이 피아니스트에게도 수줍음이 꽤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또한 일종의 페르소나가 발현되는 순간일 수 있다. 이선지는 재즈인으로, 엄마이자 아내로, 여성으로 2018년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다. [Song of April]은 피아니스트 이선지가 재즈 안에, 혹은 오선지 안에 머물지 않고 진정한 “재즈의 노래”를 부르게 됐음을 증명한다. 처절한 화두를 눅이고 또 눅여서 역설의 섬세한 감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 이선지의 음악은 이제 더할 나위 없는 신뢰를 획득했다.
김현준(재즈비평가)
이선지 (p,composition)
이준삼 (contrabass)
신승규 (drums)
윤종수 (violin)
이산호 (violin)
강찬욱 (cello)
Recorded @파주스튜디오/ 악당이반
Recording engineer 민지연
Mixing, mastering engineer 이재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