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도시 중에 맨체스터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프리미어 리그를 떠올릴 테고, 누군가에게는 영국 대표 밴드 오아시스를 생각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련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전달해 주는 단어이다. 이것은 마치 고향을 떠올리면 드는 감정과도 비슷한 것인데, 그 중심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밴드 스톤 로지즈가 자리잡고 있다.
델리스파이스를 처음 만들던 시절, 그때 열렬하게 사랑했던 밴드들은 이상하게도 맨체스터 출신이 많았다. 스톤 로지즈와 함께 맨체스터 열풍 4인방에 속했던 샬라탄즈, 모리세이와 쟈니 마를 배출한 스미스, 조이 디비젼의 아픔을 딛고 부활한 뉴 오더 등등... 한 도시에서 이 많은 밴드가 나왔어? 싶을 정도로 대단한 이름들이 줄줄 이어진다. 나를 밴드의 길로 이끌어 준 고향 같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아련함과 동시에 어딘가 서글픔 같은 색채가 덧입혀져 있는 음악이기도 하고.
그런데 실로 오랜만에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 밴드가 있는데, 그 주인공은 맨체스터도 서울도 아닌 부산 출신의 “검은잎들”이라는 팀이다. “아니, 이 친구들을 어쩌면 좋지?”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 곡이 흐를 때 쯤 입에서 새어 나온 탄식 같은 말이었다. 90년대 초반에 만약 밴드를 만들면 이런 걸 해보면 좋겠다 생각했던 음악을 하는 요즘 신인 밴드라니, 이 친구들은 대체 어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인가? 징글쟁글 청아하게 돌아가는 기타 아르페지오, 이거 혹시 과거의 내가 친 건가 싶을 정도로 익숙한 베이스 라인, 그리고 모리세이를 연상시키는 다분히 문학적인 가사까지, 그 시절을 기억하는 “모던 소년 소녀”들에게 알레르기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해줄 요소들로 가득했다. 그래서 반가웠고 동시에 서글펐다.
“그래, 밴드란 건 원래 이런 거였어... 트렌드도 남들 취향도 신경 쓸 필요 없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밴드에서 실현시켜 보고픈 그 마음, 그 강렬한 욕망이면 되는 거였어...” 어쩌면 당연한 진리를 검은잎들의 앨범을 들으며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요즘 인디씬에서 나오는 음악들, 미끈하고 실력있고 잘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잘 다듬어져 있어서 그게 좀 아쉬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간만에 이런 날것을 들고 나온 친구들이 있어서 반가웠다.
앨범을 한장 다 듣고 나니 멤버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도 궁금해진다. 만나서 좋아하는 밴드가 뭔지 물어보고 싶고, 작업할 때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도 구경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조언? 그딴 거 듣지 말기를. 요즘엔 이런 악기 정도는 써줘야지, 요즘엔 이런 사운드가 대세야,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말기를. 그냥 썅마이웨이로 부디 자신의 길을 가기를.
델리스파이스의 “항상 엔진을 켜둘게”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항상 듣던 스미스를 들으며 저 멀리로 떠나자”
스미스 말고 검은잎들을 들으며 그들의 고향인 부산 바닷가로 떠나고 싶어 진다. 내가 느낀 아련함과 서글픔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어서. 그곳에서 30년 전 우리의 모습, 모던 소년 소녀들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발견하게 될까 기대하고 싶어서.
윤준호 (델리스파이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