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PICTIONS) [상징들 (2)]
1. 예기치 못한 풍요는 스스로를 쓸만한 톱니바퀴라 여기던 많은 이들을 마취시켰고, 아버지는 가끔 이유 없이 집을 부쉈다. 매일 밤 열 두 시간을 노동에 바친 지난날이 그리워서는 아니겠지만, 뜻밖에 찾아온 권태감을 달리 승화시킬 방도를 찾지 못하셨을 터이다. 생기 없는 폭력에 물건들이 나뒹굴면, 몇몇은 스스로 일어나 자리로 가고, 몇몇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들을 일으켜 세웠다. 모든 것이 정리되면 모든 것이 나태로웠다. 아버지 역시 씩씩대던 숨을 거두고 이내 소파에 몸을 뉘인채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하나뿐인 오래된 친구는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이내 화면이 송출됐다.
2. 어릴 적, 몇 년 쓴 휴대폰을 새로운 기종으로 바꾼 뒤 나름의 기념으로 벽에다 던져 부수려 할 때 누나가 말했다. 불쌍해, 그래도 몇 년이나 같이 했잖아. 그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팔뚝은 이내 시들어 아래로 쳐졌다. 기스난 액정을 엄지로 몇 번 문대보곤 두 번째 서랍 깊숙한 데 넣었다. 그 뒤론 찾지 않았다.
3. 우리는 수단에게 최후의 목적을 내어줬지만, 그 누구도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심 작은 기대들을 품게 되었다.
4. 구식의 컴퓨터가 그렇듯 나는 언어부터 가르쳐야 했다.
커버디자인 유민희, 「Blue 32%」
Cover Design by Minhee Yoo, 「Blue 3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