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우리 주변에 흔히 머문다면 상상은 가끔 일상 밖에 존재한다. 나아가 환상은 상상 너머로 피어난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우리가 겪지 않은 ‘있을 법한 현실’을, 한편으로는 평생 ‘겪지 못할 세계’를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두 눈에 보이는 화면과 별다른 대사 없이 오롯이 음악을 통해 영화를 짓는 뮤지션 GILLA가 바로 그렇다.
영화는 최소 단위의 연속적 화면인 ‘쇼트’(Shot)를 묶어 하나의 ‘신’(Scene)으로 분류되고, 몇 개의 신이 모여 하나의 스토리 단위인 ‘시퀀스’(Sequence)를 이룬다. 앞선 EP [Fragments](2019)로 상상의 조각들을 섬세하게 이어 붙였던 GILLA는 이번 새 EP에서 조각 대신 보다 구체적인 장면들을 소환해 이를 하나의 유려한 시퀀스로 완성했다. 제목에 영화 속 용어를 빌려온 만큼 7개의 트랙은 단일한 서사와 스토리로 긴밀하게 이어진다.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두고 차분하게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겹’에 이어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굴처럼 본격적인 환상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Rabbit Hole’, 갖가지 모험담과 인상적인 장면들을 뒤로 한 채 이 모두를 아스라이 멀어지는 희극의 풍경으로 종결짓는 마지막 트랙 ‘희극’까지. 균일한 톤, 그러나 저마다 다른 재미와 분위기로 엮인 곡들이 듣는 이를 그만의 이야기 속으로 이끈다. 보컬 트랙과 인스트루멘탈 트랙, 짧게는 1분이 채 안 되는 곡부터 3분가량의 곡이 자유자재로 교차하며 이어지는 호흡은 훌륭한 작곡가이자 사운드메이커를 넘어 프로듀서로서 GILLA의 역량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서사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Sequence] 세계관을 이루는 독특한 공기와 색감이다. 현실에서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인물, 캐릭터들이 가상의 세계에서 그만의 파라다이스를 이루듯 각종 클래시컬한 악기 사운드와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어떤 우열이나 구별 없이 하나의 빈티지 사운드로 어우러진다. 이는 마치 생전에 본 적 없는 오래된 명작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만 같은, 혹은 봐서는 안될 비밀의 세계를 훔쳐보는 재미와 반가움, 긴장감이 뒤따른다.
‘데자뷔’는 처음 본 대상이나 겪은 일을 마치 이전에 겪었다고 느끼는 환상을 일컫는다. 사운드의 신선한 조합을 통해 신비로우면서도 반가운 판타지, 조금 어둡고도 유쾌한 세계를 창조한 [Sequence]에 제법 잘 어울리는 단어다. 물론 이 앨범을 앞에 두고 마주하는 기묘한 낯섦과 아련한 반가움은 단순한 데자뷔와 조금 다르기도 하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실은 누구도 본 적 없는 세계에 대한 기묘한 데자뷔 같다.
1. 겹 (feat. 동경)
composed by GILLA
lyrics by 동경
arranged by GILLA
2. Rabbit Hole
composed by GILLA
arranged by GILLA
3. Pygmalion (feat. 구현)
composed by GILLA, 구현
lyrics by 구현
arranged by GILLA
4. 몽상가
composed by GILLA
arranged by GILLA
5. Kinetic Garden
composed by GILLA
arranged by GILLA
6. writhe (feat. slchld)
composed by GILLA, slchld
lyrics by slchld
arranged by GILLA
7. 희극
composed by GILLA
arranged by GILL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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