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전부, 또 하나의 숲
조동진의 노래 [겨울숲]을 몰입하여 듣고 또 듣는 중이다. 예쁘고 정갈한 피아노, 필연에 따라 조직됐을 패드, 생기와 의욕을 넘나드는 베이스, 그 곳 말고는 놓일 수 없는 특정한 화음들 간의 아무리 훌륭한 조화라 하더라도, 삶의 품위를 보여주는 한 인간의 목소리에는 견줘질 수 없는 것 같다. 그의 노래를 듣거나 부르다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고 그가 전해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낯선 의심과 각성이 일어난다.
왜 조동진의 노래는 부르기 어려운 거라고들 할까? 음악사회학자 이기웅이 조동진 1집(원작(1979)/재녹음본(1986))을 평한 2003년 글에는 ‘당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이 그의 작품에 손을 대어 보았지만 이 중 성공작으로 간주할만한 것을 집어 들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그의 노래가 지녔다는 ‘조금만 힘을 빼도 싱거워지고 조금만 감정을 불어넣어도 혼탁해지는 극도의 예민함’이 그 이유로 들어지며, 나아가 ‘조동진의 노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결국 원작자인 조동진 자신밖에는 없었던 것’이라는 단언적인 표현도 보인다. 나도, 너무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동진 노래는 조동진이 불러야 제 맛’이라는 세평은 정확하면서 무관심적이다. 조동진 노래가 이렇게 어려워진 이유가 있다면 그 노래가 우리의 어떤 ‘양심’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건드려진 양심으로 인해 일깨워진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는 일은, 그의 노래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 일처럼 늘 어려웠다.
2017년 8월 28일, 조동진은 세상을 떠났다. [리마스터드에디션2017조동진](푸른곰팡이, 2017) 박스에 담긴 책들의 표지날개에 실렸듯 그는 ‘좋은 곡을 쓰고, 연주하고, 노래했다’. 그 글을 읽을 때마다 ‘아, 좋다. 정말 좋은 소개글이다. 조동진을 그와 관련한 자료들로만 알은체하려는 사람이라면 결코 쓸 수 없는 글이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 대한 겉치레 존경심만으로 ‘음악인만큼이나 엔지니어들과 가까이 교류하며 고민을 나누고 함께 작업했다’거나 ‘많은 동료, 후배 음악인들과 어울렸고 깊은 음악적 영향을 주고받았다’와 같은, 허영과 과장 하나 없는 문장들이 써질 수 있을까. ‘깊은 신뢰와 친밀감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들려주었다’라니! 그의 음악과 삶에 관해 이보다 간결하고 진솔한 표현이 없을 거라고 믿는다.
‘당대를 주름잡던 가수들’에게도 녹록찮았다던 그 일을, 그 시대와 어쩌면 무관해 보이는 두 사람이 조용히 해냈다. 한소리와 이원혜. ‘새의전부’라 불리지만 그들은 무엇보다 생전의 조동진과의 짧은, 즐겁고 따뜻했던 만남을 간직하고 있는 두 사람이다. 20여 년 전의 ‘겨울 숲’은 그들-새의전부의 긴장된 목소리의 줄기를 타고 2019년 오늘 새로운 어린 정령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997년 하나음악그룹이 출반한 옴니버스앨범 [겨울노래]에 담긴 열두 곡의 노래 중 11번 트랙에 실린 [겨울숲]은, 앞서 말했듯 세련된 음악적 치밀함으로 꾸며져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동진의 노래 부름이 만든 것일까, 어떤 여백의 아름다움이 흐르고 만다. 단순함과 비움의 측면으로 보자면 새의전부의 [겨울숲]은 조동진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욱 인상적이지만, 그러나 거기엔 ‘정말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해온 예술가의 투철한 실험과 눈물과 놀라움과 고요함의 뼈아픈 결과물로서의 ‘여백의 미’가 느껴지지 아직 않는다. 여백의 미는 여백이 아니라 여백의 미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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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전부의 음악적 한계에 관해 한마디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용기 내 열어 보여주려는 인간의 순수함과 씩씩함이다. 나는 새의전부가 조동진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데에 시간을 썼다기보다 조동진이 하려고 했던 것을 찾고 이어가는 일에 정성을 들였길 바란다. ‘조동진의 노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따로 있을 리 없다. 그가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삶의 목소리로 불렀듯 새의전부는 조동진의 노래를 새의전부의 구체적인 삶의 목소리로 불렀다. 그렇게 들렸고, 그러면 되었다. ‘여백의 미’라는 것도, ‘삶의 품위를 보여주는 목소리’라는 것도, 좋은 곡을 쓰고 연주하고 노래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얻어질 것이다. 얻지 못하거나 얻은 줄도 모르거나 해도 상관없다. 다만 음악이란 인간을 향한 ‘깊은 신뢰와 친밀감’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진실만은 잊지 말기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은 깊고 무성한 숲이라기보다, 작고 여린 숲이다, 그 숲은. 그렇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고 부끄러운 현재를 거장의 유작과 감히 겹쳐 드러내고 있는 새의전부의 [겨울숲]. 그러나 바로 그럼으로써 그들은 환상처럼 존재했던 한 숲의 부드러운 숭고함을 기억한 채 지금-여기에, 우리의 정직한 노래로 또 하나의 숲을 피워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두 개의 참 아름답고 슬픈, ‘끝없이 푸른 겨울 숲’을 가지게 되었다.
글: 김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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