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디드 플라이' 3집 [종이컵 포도주]
[종이컵 포도주]라 적힌 메일을 받았습니다. 다른 내용은 없이 노래 11곡이 든 메일이었습니다. 노래를 스마트폰에 내려받아 이어폰으로 들으며, 최근에 쭉 하고 있는 단순노동을 이어갔습니다. 손 놓고 노래에만 집중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분이 그러시더군요. "죽어야 끝나는 일이겠죠" 어쩌면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일들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서 노래를 들었습니다. 다행히 [종이컵 포도주]는 일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몇 번째 곡을 들었을 때였을까, 문득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고약하기 짝이 없는 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와 일을 핑계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되었죠. 단둘이 아니기는 했지만, 남자는 그 여행을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일테면 '어색한 상황을 바꾸고 싶을 때' '화를 풀어주고 싶을 때'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을 때' 따위의 민망한 제목을 노골적으로 붙인 편집앨범을 한 상자나 자동차에 싣는 것처럼. 그 장면을 떠올리면 언제나 웃음이 나지만, 사실 저도 비슷한 습관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처럼 대놓고 앨범 표지에 붙여 두지는 않지만, '술자리 흥을 올리고 싶을 때' '사치스럽게 우울함에 빠지고 싶을 때' 등으로 남몰래 부르는 앨범들이요. [종이컵 포도주]를 듣다가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을 기억해낸 건 그런 작명본능이 오랜만에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하나... 생각에 빠지다 보니 고된 일을 하는 중이란 사실도 잊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곡이 끝날 때쯤 '시간 속에 길을 잃었을 때'라는 이름이 불현듯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약간 SF영화 제목 같기는 하지만, 이 앨범이 제게 준 느낌은 그랬습니다.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지만, [종이컵 포도주]는 제가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는 걸 자각하게 해줬으니까요. 물론 그 깨달음과 동시에 제 두 발은 지금 이 순간의 땅으로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언제나 전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믿음은 종종 착각임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 앞으로 이 앨범을 자주 들을 생각입니다. 당신은 운디드 플라이 3집 [종이컵 포도주]에 어떤 제목을 붙이고 싶을까요? 그나저나 'mystery' 속 냉면집 누렁이는 어떤 아이일지 정말 궁금합니다.
WOUNDED FLY-종이컵 포도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