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대의 경계에서 노래하는 아포리즘 섬세한 사운드와 감성의 밴드 'hyukoh' 의 데뷔 EP 앨범, [20]
20. 누구에게나 설레는 숫자임에 틀림없다. 갓 스물을 넘긴 보컬 오혁과 그의 밴드가 데뷔앨범 제목을 20으로 정한 데에는 필연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20은 아직 설익은 청춘의 숫자이다. 본 앨범에는 10대의 마지막인 열아홉 살과 십대를 갓 벗어나 한참 어설픈 나이인 스무 살, 그리고 성년의 초입단계인 스물한 살에 쓴 곡들이 각 시기 당 2곡씩 묶여 총 6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과도기 나이인 스물은 특별한 시기이다. 막 10대를 벗어나 20대에 진입한 이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세상을 향한 모든 감각이 가장 확장되는 시기이자 경험의 스펙트럼이 이전과는 비교 불가하리만큼 넓어진다. 성인 이라기엔 너무도 불완전할뿐더러 시행착오도 잦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직은 실수나 잘못을 해도 용인되는 메리트도 있음은 분명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시도든 가능한 시기인 것이다. 이 시기를 막 지나는 사람만이 가능한 신선함이 존재하고 그 가능성은 말랑말랑하게 열려 있다.
'hyukoh' 는 갓 20대의 감정에 주목한다. 그 중심에는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있다. 사회적 관계망이 채 형성되지 않은 시기에 겪게 되는 수많은 인간관계. 리좀(Rhizome)의 형태로 끝없이, 그리고 연결고리가 부재한 채로 중첩되는 이 관계의 레이어들은 다양한 감정과 회의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전곡의 작사, 작곡, 편곡을 맡은 보컬 오혁은 십대 마지막까지 20년 가까운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20살이 되어서부터 서울에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hyukoh라는 이름으로 홀로 활동해오다가 마음 맞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밴드 hyukoh를 새롭게 시작했다. 갓 스물을 넘긴 이 개성 넘치는 소년들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새로운 장르를 겁 없이 시도한다. 어반 R&B적인 보컬과 과장된 리버브는 여태껏 20 대의 감성을 노래해오던 달달함과는 조금 다른, 마음 속 깊은 어느 구석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듯한 자극을 심어준다.
Childhood나 Mac DeMarco를 연상시키는 멜랑콜릭한 사운드로 구성된 볼륨감은 신선함이 놓치기 쉬운 완성도를 잊지 않고 충족한다. 여기에는 미술 이론을 전공한 보컬 오혁의 특이한 배경 역시 한 몫하고 있다. 그는 올해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시의 퍼포머이자 패션필름 및 각종 전시의 음악 감독으로서 전방 위에서 활동해왔다.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도 독특한 활보를 이어온 그의 경험이 타고난 세련된 감각과 함께 녹아 들어 있다.
타이틀 곡 "위잉위잉" 은 십대가 끝날 때 느낀 허무함과 염세적 기분이 배경이 되는 곡이다. 희망을 목 놓아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부각시키지만 마치 햇빛 아래 몸을 뉘인 듯 어딘가 보송보송하다. 사실 관계 맺는 것만큼 쉽고도 어려운 일이 없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관계망으로 인한 부조리함을 반복해서 목도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당신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알고 싶지만 한편으론 결코 알고 싶지 않은 이항대립적인 심정은 어딘가 틀어박히고 싶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이 누군가에 대한 이유모를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걸`이라고 말하는 듯한 곡의 분위기는 루마니아의 철학자이자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을 연상시키는 섬세한 단어 선택으로 무르익는다. 정제된 표현력은 궤도를 탈주한 채 끝없이 겉도는 듯한 인간의 고독함과 소외감을 낯간지럽지 않게 끌어오는 동시에 미학적인 치밀함도 갖추고 있다.
전곡의 작곡, 작사를 맡은 보컬 '오혁' 이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곡은 "I Have No Hometown" 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랜 해외생활이 가져온 노마딕(nomadic)한 감성이 제목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표류하는 부초처럼 불안정한 수면 위에 몸을 싣고 곧잘 떠다니기만 하는 20 대의 당신을 떠올려보라. 정립되지 않은 인간관계는 범람하는 파도처럼 20대를 침식해간다.
하루하루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순식간에 인상을 주고받는 교류의 스파크가 튄다. 그러나 이 짧은 인상은 파편적으로 조합된 정보들에 불과하고 진실함과는 거리가 멀어 인상들로만 이루어진 얕은 관계들이 어렵사리 지속될 뿐이다. 이런 단편적인 관계의 반복은 누구에게나 회의감을 가져온다. 오혁은 여기서 사람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랜 관계를 맺어온 자신의 고향이리라 여겼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로는 충족할 수 없는 것들이 소위 동네 친구라고 불리는 관계에서 채워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향이라 부를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황량한 마음은 노스탤지어(Nostalgia)를 불러왔다. 노스탤지어는 흔히 알고 있듯이 향수를 말하는 용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지나간 시기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남아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누구에게나 끝없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옥수수 밭을 뛰어놀며 거리의 오래된 벽돌을 어루만지던 시기가 있다. 이 잃어버린 시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는 로스탤지어(Lostalgia), 즉 인간 존재의 근원적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시인 최영미가 그녀의 시에서 말했듯이, 무덤처럼 부어 오르는, 어떻게든 해야 하는 시간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의 염증을 품은 채 예민하고 아프게,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hyukoh' 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이로 이와 같은 삶의 암(暗)을 조곤조곤히 밝혀간다. 이처럼 치장하지 않은 무덤덤함은 타고날 수밖에 없는 감각과 성찰로 가능한 것이다. 마치 알베르 카뮈가 그의 에세이 시지프스 신화에서 끝나지 않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가 지난한 자신의 삶의 불가피함과 부조리함을 깨닫는 순간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한 것과 닮아 있다.
존재의 무연고성과 부조리함은 이를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을 방황하게 한다. 그래서 때로는 마냥 껴안아주고 달래주는 이보다는 원래 다 그런 거지라고 말하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걸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 이들에게 'hyukoh' 의 곡들이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 임다운, 큐레이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