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다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완결의 음악
누군가 자신의 소리를 온전히 담기 위해 27년을 기다렸다. 50여년의 시간을 휘휘 돌아 세상을 향해 첫번째 정규 앨범의 흔적을 남긴다. 괜시리 짠한 일화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럽고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젊은 날의 희망 따위를 뒤늦게나마 실현한다는 것이 더러는 호사스럽고, 더러는 고통스러울 시간이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1993년 유재하 가요제 금상 출신이라는 이력 뿐일 수도 있는 송 라이터 김석준의 음악은 그래서 그냥 흔히 듣고 소비하는 것 이상의 경청과 관찰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일까 ? 내가 몰랐던 타인의 이야기는 마치 내 것의 이야기인 양, 내 안에서 피어내는 소리인 양 진심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음악이라는 것이 이 사연 많았을, 중년의 삶에 있어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이었던가를 되물어 보고 싶을 만큼, 그가 빚어낸 한 음 한 음의 소리 덩어리들은 커다란 공명으로 무뎌진 일상과 감각을 건드린다.
희안한 음악이다. 우선 낡은 일기장을 들춰보는 불편함, 그런 관성이 없어서 좋다. 청승맞거나 촌스럽지 않다. 그럼에도 한 곡씩 들을 때 마다 잊고 있었던 담배를 피게 된다. 청취를 방해하는 빛과 불필요한 소리와 움직임을 멈추게 한다. 그의 음악을 촘촘히 채우고 있는 곡의 완성도, 정교한 사운드와 화성과 연주, 완급의 공간감 조차도 오히려 부차적인 요소이다. 오랫동안 김석준을 응원하고 그의 존재를 주제로 부각시켜주고, 보컬, 연주, 녹음 등의 자리에서 주변을 채우고 있는 동료들의 마음이 절절하고 필사적임도 이 앨범의 전면을 감싸는 훈훈한 에너지이다.
ཐ세기 소년'이라는 밴드 앨범의 표제는 절묘한 작명이다. 백년은 더 되어버린 듯한 시점인 20세기의 음악적 정감을 고스란히 담고 있되, 누추한 향수, 복고의 취향이 아니라서 더욱 반갑다. 쉰을 넘어선 '소년'의 음악은 남루하지 않게 오늘의 음악적 스타일을 세련되게 수용, 흡수하고 있기에 성공적일 수 있었다.
앨범을 한 방에 다 듣고 나니, 긴 시간을 두리번 거리다 절로의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어느 중년의 사내가 보인다. 의도했던대로 20세기의 소년의 초상이 겹으로 보인다. 쉰의 나이를 넘어 음악 동네 안팎을 서성이다 비로소 세상에 건네는 그의 소리는 그래서 더 고결하다. 아름답다. 정교한 이음새와 완성도 높은 사운드와 구성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런 수준높은 음악이라면 진작에 나왔어야 했지만, 숱한 수정과 번복, 그리고 오랜 기다림과 세공의 과정이 있었기에 지금이어도 적당한 것 같기도 하다. 잘 만들어진 음악만이 누릴 수 있는 교감과 소통의 작용이 있어, 이런 용기의 음악이 괜시리 고맙다.
(하종욱 / 음악 칼럼니스트, 마장뮤직앤픽처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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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노래 하나를 꺼내본다. “난 하루 종일 너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 그런 내 마음을 너는 알고 있는지” 이 안타까운 연가 ‘하루 종일’은 1999년 하나음악에서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New Face]에 실려 있다. 앨범의 프로듀서를 맡은 조동익은 [New Face]를 새로운 시대의 [우리 노래 전시회]처럼 만들고 싶어 했다. 조동익은 최성원이 프로듀서를 맡았던 [우리 노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어떤날이란 이름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굉장한 힘을 얻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던 조동익은 이제 최성원의 역할이 되어 가능성 있는 신인 음악가를 [New Face]를 통해 인사시키고자 했다.
[New Face]엔 김세운, 김용수(16년차이), 이경, 조동희 등 여러 신인 아티스트가 참여했고 거기에는 김석준이란 이름도 있었다. 말로, 윤영배, 이규호, 이승환(스토리), 이한철, 조윤석(루시드 폴) 등 훗날 유명 음악가가 된 이들이 참여한 대회로 알려진 제5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김석준은 이 쟁쟁한 이름들을 제치고 ‘사진 태우기’란 노래로 금상을 받으며 처음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의 노래는 바로 음반으로 제작되지 않았고 기록으로 남지 않은 이들의 풋풋한 첫 노래를 듣기는 여의치 않았다 - 이후 6회 대회 기념 음반에 대상과 금상 수상곡만 함께 수록되었으나, 음원으로 제공된 바가 없어 감상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1993년 대회에서 상을 받은 김석준의 노래는 6년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들을 수 있었다. [New Face]에 실린 ‘하루 종일’은 가장 먼저 귀에 들어왔고 가장 오래 귀에 남았다. 무기력한 이별의 노래는 독특한 서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의 목소리와 호흡은 마치 김창기(동물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모던 록의 외피를 걸치고 있던 ‘구파발’의 시선과 감성 역시 독특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New Face]는 [우리 노래 전시회]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김석준이란 이름은 그 뒤로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21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놀랍게 김석준이란 이름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음악과는 관계없는 일을 하며 일상을 살고 있었지만, 일상에서 얻은 영감을 노래로 만드는 건 멈추지 않았다. 그 노래들을 발표하는 데는 박용준, 윤정오 등 동료들의 응원과 위로가 있었다. 작년 김석준의 모친상 때 조문을 위해 모인 동료들은 그가 그동안 써온 노래들을 발표할 것을 권했고 지원도 약속했다. 데뷔한지 27년이 된 중견 음악가지만 그는 여전히 곡을 쓰기만 할 뿐 이를 꾸미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신인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옆에 박용준, 윤정오, 김정열(더 버드) 같은 오랜 동료가 모여들었다.
실질적인 첫 출발을 위해 많은 곡과 조력자가 준비됐다. 두 장의 음반에 13곡이 실렸다. 두 장의 음반은 성격이 사뭇 다르다. 다섯 곡이 실린 [나의 이름은]은 여전히 독특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김석준의 목소리가 담겨 있고, 여덟 곡이 실린 [20세기 소년]에선 동료들에게 연주와 편곡을 맡기는 대신 작곡가(와 보컬/코러스 디렉터)의 역할에 집중했다. 음반 제목 그대로 [나의 이름은]에는 김석준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있고, [20세기 소년]엔 20세기를 지향하는 밴드 음악이 들어있다. 이를 위해 박용준은 [나의 이름은]에서 절반의 역할을 하며 프로듀서와 연주를 도맡았다. [20세기 소년]에선 김정렬이 중심이 된 더 버드, 김정욱의 썬데이서울, 신석철의 샹그릴라 등 세 밴드가 연주와 편곡에 참여했다. 또 김석준이 [New Face]에 참여한 것처럼 새로운 젊은 보컬리스트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다.
[20세기 소년]의 중심을 이루는 음악은 록과 퓨전 재즈다. 이제 유행이 지난 것 같은 음악이지만 20세기 소년이었던 자신이 성장할 때 듣고 좋아했던 음악을 담기로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들었다는 ‘소독차 오던 날’부터 50대가 되어 만든 ‘함경도 혜숙이’까지 그가 삶의 굽이굽이마다 만든 노래들이 [20세기 소년]에 담겼다. 세 밴드가 참여한 연주는 각기 다른 스타일의 연주로 팝, 록, 퓨전 재즈, 그리고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표현해낸다.
[나의 이름은]은 27년 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때부터 수많은 이들이 기대해온 그의 음악이 담겨 있는 음반이다. 첫 곡 ‘나비’에서 박용준의 신비로운 건반 연주 뒤에 김석준의 목소리가 나올 때 ‘하루 종일’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흥이 그대로 재현됐다. 그는 노래 몇 곡만으로 이미 자신만의 것을 갖고 있었다. 하나음악 선배 음악가들이 그의 음악을 들을 때면 “김석준 장르네”라고 말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댄스 팝 트랙 ‘눈물고개’에서도 김석준의 독특한 감성과 목소리는 중심을 지키고 있다.
두 음반을 만들게 된 계기, 그리고 두 음반을 연결시켜주는 모친의 별세는 한동준이 부른 ‘함경도 혜숙이’와 직접 부른 사모곡 ‘나의 이름은 아가’로 남았다. 다른 스타일의 두 노래, 다른 스타일의 두 음반을 들으며 처음 그의 음악을 들었던 [New Face]를 생각했다. 거기에서 그가 부른 두 노래 ‘하루 종일’과 ‘구파발’은 이렇게 연결되고 확장되어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21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루 종일’의 내밀한 감성은 [나의 이름은]으로 연결되고, ‘구파발’의 정갈한 사운드는 [20세기 소년]으로 확장됐다. 이제 첫 음반을 내지만 오래 전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있는 음악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석준이다.
(김학선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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