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의 21세기 사랑 노래
- 김석준의 디지털 싱글 "버퍼링"
98년 8월 30일은 다행히 일요일이었다.
스물 한 살의 K는 새벽 세시 논현동 포차에서 나온 그녀를 굳이 마중 나가 근처 집까지 데려다 준 다음 집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 쯤 후에는 멍하니 동호대교 가운데 지점에서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서를 지난 새벽 공기는 제법 선선했고 달은 이미 몰락했다.
달빛 대신 도시의 불빛을 모두 빨아버릴 기세로 일렁이는 강물이 문득 재미없어져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나를 일렁이게 하는 건 달의 인력이 아니라 나를 스위치온하게 만드는 그녀의 손길 뿐이다.
동네 교회 십자가 뒤편으로 붉은 동이 터올 무렵 안암동 자취방에 도착한 K는 좀처럼 바로 잠들지 못했다.
리얼 플레이어의 극심한 버퍼링을 견뎌내며 이런저런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따기도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러 가야지...라고 생각하다가 늦은 오후만 덩그러니 남았던 일요일,
98년 8월 30일은 다행히 그런 일요일이었다.
적당한 실화를 기반으로 짤막하고 싱거운 이야기를 쓰고 싶게 만드는 곡이다.
2020년은 리얼 플레이어의 버퍼링을 견디던 20세기 소년을 어떻게 기억할까?
스스로의 버퍼링을 자책하며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K(왠지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어진다)는 느려터지고 용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를 대면서
CPU 확장과 루팅을 대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애초에 그녀는 운영체제가 다른 맥이나 리눅스가 아니었을까.
못난 자신을 탓하면서도 받아주기를 바라는 남자의 마음은 아마도 대중가요에서 영원에 가까우리만치 반복되는 모티프지만
왠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상으로 고사양 PC 조립을 서슴 없이 해줄 것 같은 순박한 공대남 감성의 접근법이 새롭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어디선가 벌어질 보편적인 상황이겠지만
스타크래프트의 흥행과 PC산업의 호황, 윈도98과 리얼플레이어의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에게
이 노래는 98년도라는 특정한 시기를 끊임 없이 소환하는 마력이 있다.
그러면서도 98년에서 앞뒤 5년씩의 시간을 함께 끌어올리는 숨은 이야기가 더 많아 보이는 곡이다.
6-70년대 링고스타와 사이키델릭을 흠모하던 락키드가
세기말의 청년이 되어 수많은 사연을 만들어낸 뒤 창조해 낸 이 우직한 사랑 노래는
그래서 20세기 후반기의 문화 수혈을 듬뿍 받은 세대가 2020년도에 던져놓은 현재진행형 타임캡슐로 보아도 좋다.
왜 현재진행형인지 알고 싶다면 안드로이드 폰 언락과 루팅 매뉴얼을 부지런히 공유하지만
여자친구의 마음을 언락하지 못하는 21세기 소년들이 모인 각종 공간에 가보시라.
- reviewed by 무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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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김석준
곡명: 버퍼링 (with 조한)
리드보컬: 조한
작사, 작곡, Loop, Arpegiator: 김석준
편곡: 김준오
Drums: 신석철
Guitars: 김준오
Bass: 윤주순
Keyboards: 김태수
Chorus: 이혜림
트래킹: 성영민(컴패니언뮤직), 허성혁(사운드솔루션)
믹싱, 마스터링: 성영민(컴패니언뮤직)
자켓디자인: 김대준, 김석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