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ine
눈을 떠보니 새벽이었다. 연탄 색과 푸른색이 서로 짓뭉개지고 으스러져 섞인 듯한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던 새벽하늘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일찍 깨어버린 나는 다시 잠들기를 시도하려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아니 하였던 것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여태 인생을 살아오며 태양이 뜨면 그림자가 태어나듯 나는 얼마나 당연하게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였던가.
뜬금없이 노래를 불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이 멜로디는 이따금씩 열두 개의 멜로디 외의 엉뚱한 음정에 발을 딛기도 하였으며 느껴지는 대로 부른 것치고는 제법 그럴싸한 전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짧은 시간이 흘렀다. 이내 기행을 멈추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았다.
새벽은 새벽이다. 왜 새벽인가. 지금이 새벽인가.
지금이 새벽이 아닐 수도 있지 아니하지 아니한가.
게슈탈트 붕괴 현상으로 미간이 충분히 일그러진 것을 느끼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느끼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문득 소나무 향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나는 코가 두 개다. 하나는 현실 속 냄새를 맡는 코. 하나는 추억이 회상될 때 흘러들어오는 내음을 맡는 코. 어느 추억에서 풍겨온 소나무 향인지 눈을 감고 과거 속으로 여행을 떠나멨다. 아주 어릴 적 지금의 새벽과 비슷한 하늘일 때 큰 소나무를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 절로 미소가 번지며 웃음이 피어났다.
다시 소나무를 보았다.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그날의 큰 소나무.
그 소나무 속에서 작은 나를 보았다. 나는 웃다 울다, 울다 웃었다.
소나무. 소나무.
2. 잠이 들었네
그 어느 때보다 세상이 무거워 보였던 어느 날, 난 그저 이대로 잠들어 버리고 싶었다. 구름을 배게 삼고 노을을 이불 삼아 꿈조차도 없이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그래서 기타를 잡고 구애받지 않은 채 흥얼거려 보았다. 건조하고 심심한 몇 마디의 흥얼거림 끝에 이내 흥미를 잃어버려
기타를 내려놓고 푹신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매트리스에 누워버렸다.
무의미한 음표들이 밣고 지나간 시간의 자국 위엔 어느덧 쉼표들이 느릿하게 채워지기 시작하였고 마음의 평안을 야기할 만큼의 충분한 양의 쉼표가
시간의 자국을 넘어 형용할 수 없는 어딘가로 넘쳐흐르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노래는 시작되었다. 노을과 함께 몸을 뉘어 그렇게 잠이 들었네.
그날의 노을은 내게 그 어떠한 물음도, 해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노을, 그저 시간, 그저 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의식의 딕셔너리를 펼쳐 무형의 추상을 주조하는
작업을 해보았다. 일기를 뒤적거리고 괜스레 시계를 쳐다보고, 모든 일련의
행위를 기록하고 추억을 검색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중요하지 않다. 소리를 빌려서 감정을 들리게 해보았다. 거푸집이 어느 정도 식었을 때
보다 유려하게 들어볼 수 있었다. 그날의 노을을, 그날의 잠꼬대를, 그날의 나를.
나는 잠들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