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가 1968년 아세아레코드사 전속 시절 취입한 번안 곡들을 1971년 배호가 세상 떠난 직후 독집음반으로 구성한 앨범. 배호 특유의 비브라토와 음색 그리고 깊은 감성으로 표현된 13곡의 번안 곡들은 배호만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검은 눈동자> <장미의 탱고>와 같은 숨은 명곡을 고급스런 연주와 함께 배호의 격조 높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으며, 당시에는 수록되지 않은 <연심>이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더욱의미가 깊다.
음반 해설(부분 발췌) :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천 년의 비색]
본 음반은 배호가 1968년 아세아레코드사 전속 시절 취입한 번안 곡들을 1971년 배호가 세상 떠난 직후 독집 음반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968년 아세아레코드사는 배호, 이씨스터즈, 이금희, 유주용, 봉봉 등 자사 소속 가수들을 대거 동원 총 60곡(경음악 1곡 포함)의 외국가요전집을 기획 출반하였다. 팝송, 샹송, 칸초네, 클래식, 영화음악 등 세계의 다채로운 음악들이 버무려진 이 기획물은 우리의 언어와 음성으로 차려진 세계 음악의 성찬이라고 할까? 이 기획은 원래의 의미가 번역되고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왜곡되고 어색해진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 음악이 일부 계층에서만 전유되는 먼 음악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안방 음악으로 문턱을 깎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의미가 크다. 당시 아세아레코드사가 지구나 오아시스레코드사와 같이 메이저 음반사가 아니었음에도 이런 묵직한 기획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배호’라는 대형 가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호는 67년 병상에서 취입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비롯해, 68년 누가 울어, 안개속에 가버린 사람, 두메산골 등으로 이어지는 우리 가요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곡들을 쏟아냈다. 이런 기적과 같은 배호의 성장은 그대로 메이저 레코드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아세아레코드사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대형사와 경쟁에서의 중과부적을 배호, 전우, 배상태, 나규호와 같은 소수의 천재적 인물로 맞섰다고 할까? 여전히 기저 질환을 갖고 있었지만 노래의 히트와 함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배호는 68년 한 해 동안 생애 가장 많은 곡을 취입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이 해 배호의 가수 납세 실적 3위 기록은 소속사의 위상을 감안하면 사실상 1위나 다름없었으며, TBC 방송가요대상 등 각종 가요상을 휩쓺으로써 배호 생전에 68년이 가장 행복한 해였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배호는 자타 공히 가요계 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이런 힘은 아세아레코드사가 <세월 따라 노래 따라>와 같은 국내가요 시리즈 및 외국가요 시리즈 등 굵직한 기획 음반을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특히 외국가요 전집은 곡의 번안과 편곡 그리고 가수의 역량 등 거미줄처럼 얽힌 조직체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아세아레코드사 최전성기의 기념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총 15명의 가수가 참여한 이 기획물에서 배호가 부른 노래는 60곡 중 13곡이나 된다. 신장염이라는 기저질환으로 충분히 연습할 건강이 되지 못했음에도 배호가 건강한 사람들 이상으로 많은 곡을 소화할 수 있었다는 건 그가 얼마나 리듬과 음악에 천부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얕은 샘물은 하루 볕에도 말라버리고 말지만 깊은 우물은 사계절 퍼내도 더 맑게 더 깊게 고이는 법이다. 그것이 배호다. 배호는 노래 하나로 어느 날 갑자기 일어선 기린아가 아니었다. 돌아가는 삼각지가 태어나기까지 배호는 9년 동안 드럼을 두드렸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단순히 도롯도 풍의 노래 한 곡이 아니라 그것은 10대 시절부터 배호가 드럼을 통하여 탄탄하게 다져온 팝과 락, 부르스와 왈츠, 탱고와 재즈 등 한 시대의 주요 음악에 대한 감각이 집약된 융합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감각은 누가 울어나 비 내리는 명동, 두메산골과 타부, 썸머 타임과 Dark Eyes에도 두루 스며 있다. 배호 특유의 비브라토와 음색 그리고 깊은 감성으로 표현된 13곡의 번안 곡들은 번안 곡들이 빠지기 쉬운 생경함이나 조악함을 넘어 배호 만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특히 쉽게 접할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장미의 탱고>와 같은 숨은 명곡을 악기 장인들의 고급스러운 연주와 함께 배호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귀의 행복이 아닐 수 없다.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드럽고 강하게 음악을 읽어 주는 남자, 만질 수 없는 배호의 목소리에서 우리 민족이 낳은 세계적인 유산, 신비의 비색을 간직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국보 제68호)의 질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71년 배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음반 <매혹의 가수 배호 팝송 시리즈>. 이것을 손에 잡으면 국보급 보물 앞에 섰을 때의 떨림이 있다. 여기에 담긴 13곡은 단순 번안 곡 실험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시 재현할 수 없는 천년의 비색, 배호의 격조 높은 음성으로 빚어진 문화재이다.
글 / 최찬상(시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