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산에서부터 저 해변의 끝자락까지, 나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도 당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가장 높은 산에서부터 저 해변의 끝자락까지, 나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도 당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짙은 어둠은 가장 옅은 빛에도 쉽게 무너진다. 끝나지 않는 낮과 끈질기게 나를 쫓아오던 어둠이 끝내 나를 집어삼켰다. 당신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며, 그리워하던 나의 주관은 ‘나’라는 이름을 잃고 와해되었고, 결국에는 아무런 지향성이나 의지도 갖지 못하는 존재의 파편들로 흩어졌다. 나의 세계와 세계의 거주자들까지도 그들의 본질을 구성하던 나의 주관과 함께 부서져 휘날리다가, 인식의 저 편에서 서로 뒤섞이고 몸부림치며 공기처럼 부유했다.
나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들이 중첩되며 파도를 일으켰다. 내 이전의 세계는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그리움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함께 더 이상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원소들로 회귀하였고, 모래알 같은 그리움의 조각들을 가지고는 그 누구도 이 그리움이 당신에게 귀속된 나의 흔적임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다. 대상이 사라진 그리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담을 수 없는 순수한 형식으로 환원되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의 세계에 존재했다. 직진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히 나를 빗겨갈 것만 같았던 당신의 현존이 가장 순수한 그리움의 형식으로 내게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떠내려온 우리들의 존재 조각들은 각기 다른 것들이면서 동시에 전체였다. 우리들의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써, 어떤 제약이나 규율도, 영역이나 경계선도 갖지 못한 가능성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들은 새롭게 태어나게 될 모든 것들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우리는 들판에 뭍인 수많은 씨앗들과 같이, 언제 끝날지 모를 이 혼돈의 끝을 기다리면서 광활한 대지 아래에 갇혀 있다. 가장 높은 산에서부터 저 해변의 끝자락까지, 나는 당신의 부재 속에서도 당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