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음반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추사(秋詞) 10곡과 그 반주음원이다.
고산 윤선도는 정철, 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어부사시사〉를 비롯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그러나 정치 생활은 순탄치 않아 당파싸움에 휩쓸려 17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 동안 세상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았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 고집과 칼날 같은 성품을 지녔지만 백성을 아끼는 따뜻한 인정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윤선도는 서울에서 윤유심(尹唯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명문가였고 고조부인 윤효정은 전라도 해남에 넓은 땅을 가진 대부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난한 백성을 보살피기에 앞장섰는데, 생활이 어려워 세금을 내지 못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대신해 여러 번 세금을 내 줄 정도였다고 한다.
윤선도는 여덟 살 때 숙부인 관찰공 윤유기(尹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를 어여뻐한 숙부는 그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고,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깊은 산속의 절에 머물게 하며 학문을 닦을 수 있게 했다. 외로운 산속에서 오래 지내다 보니 그는 자연을 살피고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독학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해 26세 때 진사에 수석으로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 상황은 어지러웠다. 이이첨 일파가 광해군을 에워싸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선도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벼슬을 단념했다. 그가 이렇게 단칼에 벼슬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강직한 성품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호 가문에서 태어나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윤선도는 1616년(광해군 8) 대담한 상소문을 올렸다. 이이첨의 횡포와 영의정 박승종, 왕비의 오빠인 유희분이 국정을 그르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문을 미리 본 이이첨 일파는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윤선도를 죄인으로 몰아 변경 지역인 경원, 기장 등으로 유배를 보내고, 그의 양아버지 윤유기도 관직에서 추방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농사를 짓고 시를 짓는 등 조용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이이첨 일파가 처형되자 윤선도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인조는 윤선도를 의금부 도사에 임명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고향인 해남에서 지냈다. 1628년(인조 6)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로 추천을 받은 그는 왕자들의 교육에 전력을 쏟아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호조 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 문학에 이르기까지 주요 요직을 거쳤지만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태도가 눈엣가시였던 우의정 강석기의 시샘을 받아 경상도 성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에는 현감직마저 박탈당했지만 그는 해남으로 돌아와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해남의 젊은이와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왕자와 왕족들이 피란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강화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에 함락된 뒤였다. 그는 돌아가는 길에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청군에 항복하고 서울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했다.
그러나 항해 도중 들렀던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낙서재(落書齋)라는 정자를 세워 이곳을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정 대신들은 그가 병자호란으로 고초를 겪은 임금에게 문안도 드리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그를 다시 영덕으로 유배 보냈다. 1년 정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보길도로 돌아와 시와 음악을 즐기며 살았다.
그 후 그가 가르쳤던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여러 차례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보길도에서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즈음 그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썼다. 당시 어민들 사이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내려온 어부가가 불리고 있었는데 한문투가 많아 실제로 부르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이 노래를 어부들의 살아 있는 언어를 이용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의 노래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그는 이렇게 어민들과 어울리며 지냈다.
효종은 거듭 윤선도를 조정으로 불렀다. 1652년 예순여섯 살의 그는 정4품 성균관 사예가 되어 관직에 다시 나아갔다. 효종은 곧 그를 동부승지로 승진시키고 곁에 머물게 했으나, 반대파의 견제가 심해지자 그는 건강을 핑계로 사직을 요청했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승들의 횡포를 보게 되면 반드시 그 잘못을 짚었다. 그러다 보니 조정 관료들의 비방을 면할 수 없었고, 결국 그는 다시 보길도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자신을 기다려 주는 훌륭한 정원과 서가, 그리고 제자들이 있었다. 비록 조정에서 배척받은 입장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요로운 생활이었다.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윤선도는 왕릉을 모실 장소를 심의하는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고른 장소는 반대파의 반대에 부딪혀 선택되지 않았다. 게다가 효종의 계모(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이나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인 윤선도는 송시열, 송준길 등 노론에 맞서 3년을 주장하며 상소로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었다.
삼수는 혹독하게 추운 곳이었다. 73세의 노인을 그렇게 험한 지방으로 유배 보내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워낙 반대파의 주장이 강력하여 그는 이곳에서 6년이나 보내야 했다. 그는 귀양지로 떠나면서 아들인 인미(仁美)에게 편지를 남겼다. 주로 《소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적선’과 ‘근검’이 집안의 융성을 위한 최고의 덕목이므로 이를 꼭 지켜 나가기를 당부하는 편지였다.
그 후 전라도 광양으로 옮겨졌다가 2년 후인 1667년(현종 9) 81세에 겨우 석방되었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힘들게 보냈으면서도 여전히 정정했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에는 〈어부사시사〉 외에도 〈오우가(五友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삼았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가객 예찬건
국가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원광대학교 국악과 졸업
제2회 전국정가경창대회 일반부 성인1부(가곡·가사) 금상수상
제13회 전국국악경연대회 가곡·가사·시조부문 일반부 대상수상
(재)월하문화재단 사무국장
선비문화기획 대표
시조시인
음반:
①‘가객 예찬건 정가·악(신나라 2CD)’
②‘가객 이세춘의 팔도유람기’,
③‘가객 예찬건의 옛노래 새가락’,
④‘가객 이세춘의 팔도유람기_우조의 완성 그리고 옛 성현을 만나다’,
⑤‘예찬건의 단소 영산회상’,
⑥‘가객 예찬건의 새 노래(新歌), 새 가락(新調)’
⑦‘가객 예찬건의 새 노래(新歌), 새 가락(新調)’2 _선비, 풍류로 쉬어가다.
⑧‘가객 예찬건의 새 노래(新歌), 새 가락(新調)’3_(사)한국시조협회 시인편.
⑨‘가객 예찬건의 새 노래(新歌), 새 가락(新調)’4_박헌오 시인(詩人)의 <대전팔경가>
⑩‘가객 예찬건의 옛노래(古歌), 새 가락(新調) 2_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자연가
⑪‘가객(歌客) 예찬건(芮讚乾)의 『옛 노래(古歌) 새 가락(新調) ⓷』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춘사(春詞)’
⑫‘가객(歌客) 예찬건(芮讚乾)의 『옛 노래(古歌) 새 가락(新調) ⓸』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하사(夏詞)’
⑬‘가객(歌客) 예찬건(芮讚乾)의 『옛 노래(古歌) 새 가락(新調) ⓹』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추사(秋詞)’
⑭‘가객(歌客) 예찬건(芮讚乾)의 『옛 노래(古歌) 새 가락(新調) ⓺』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동사(冬詞)’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