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에 부쳐
해금으로 노래를 ‘연주’한다는 것
‘노래를 부른다’라는 말은 자연스러워도 ‘노래를 연주한다’라는 말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부르는 노래’와 ‘연주하는 음악’은 서로 몸을 섞고 교감하며 음악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일례로 모차르트가 남긴 오페라 속의 아리아는 그의 협주곡이나 실내악곡으로 녹아들었고, 악기를 위해 태어난 선율들은 오페라 속의 노래로 안착했다.
이번 음반은 천지윤이 해금으로 연주한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곡이 각각 5곡씩 담겨 있다. 두 작곡가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 마냥 들으면, 어느 순간 천지윤의 창작곡처럼 다가온다. 그의 해금이 김순남과 윤이상이 펼쳐놓은 선율의 길을 그대로 따라 걷지 않기 때문이다. 해금과 함께 하는 클라리넷(여현우), 기타(박윤우), 피아노(조윤성)도 해금의 갈지자 걸음에 보폭을 맞추고 있다.
누군가는 이 음반이 가곡의 선율을 단순히 악기로 재연(再演)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럴 때 악기는 노래의 선율을 모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지윤의 해금은 다르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 푸른색 염료는 쪽에서 얻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의미처럼,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곡으로부터 나온 음악이지만, 천지윤의 음악과 연주는 가곡들보다 어떤 분위기와 소리의 향기를 더 많이 지니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가곡은 시어(詩語)와 함께 태어난다. 작곡가들은 가곡을 지을 때, 시에 탐침을 밀어 넣어 노래로 태어날 가능성을 일깨운다. 한편 선율의 기둥을 세운 미완의 집에 시를 초대하여 노래의 집을 완성하기도 한다. 세상의 가곡들은 보통 이러한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 따라서 가곡은 음악과 문학이 공존하는 집이다. 성악가에게 이러한 가곡은 ‘부르는 노래’이자, ‘읊는 시’이다.
가곡을 악기로 연주할 때, 가사와 시어는 사라진다. 악기에는 입이 없기 때문이다. 악기는 가사가 떨어져 나간 반쪽짜리 가곡을 자신의 소리로 연주할 뿐이다. 하지만 가곡에 매료된 음악가들은 떨어져나간 가사가 남긴 공백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 공백에 인간의 목소리가 낼 수 없었던 특별한 선율이나 화성, 꾸밈음 등이 만개하도록 했다. 슈만의 가곡 ‘헌정’을 피아노로 연주했던 리스트는 리케르트의 시까지 챙기지는 못했지만, 가사가 사라진 곳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녹여 넣어 세상에 두 곡의 ‘헌정’이 공존할 수 있도록 재창조했다. 비단 서양음악뿐만 아니다. 한국 전통음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노래에서 태어난 곡들이 많다. 사람들은 노랫가락을 악기로 연주하다가 가사를 덜어냈다. 사람의 목소리를 위해 태어난 곡은 이렇게 악기를 위한 음악을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창작국악을 위한 창조적 원료로 사용되는 산조(散調)의 탄생 내력도 이러한 과정과 역사를 품고 있다.
천지윤의 해금은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락이 품고 있는 가사까지 노래하진 못한다. 하지만 ‘가사 없는 노래’의 공백을 그녀는 마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해금은 가사의 옷을 벗은 선율들을 모티프로 삼아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그래서 김순남과 윤이상의 원곡에 천지윤의 해금-노래도 함께 흐른다. 그 노래는 어쩌면 천지윤이 해금으로 부르고 싶은 노래였을지도 모른다. 김순남과 윤이상가 만든 노래의 숲길로 걷는 척하다가 자신만의 길을 내는 천지윤의 발걸음… 다 불린 가곡이 선율의 잔상을 남기고, 시어의 아름다움을 남기듯, 천지윤의 해금-노래가 끝나는 자리마다 ‘천지윤의 노래’가 남는다. 이 음반이 지닌 매력이다.
또 다른 매력은 천지윤이 들려주는 해금-노래의 ‘자연스러움’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김순남의 ‘자장가’를 개인적으로 처음 들었던 것은 가야금 앙상블 사계(四季)가 발매했던 2001년 음반을 통해서였다. 25현 가야금과 22현 저음가야금이 피아노를 대신하고, 사계의 멤버 조수현과 송정민이 노래를 부르도록 편곡된 음악이었다. 가야금 소리는 피아노 소리보다 헐거웠고, 그 위에 얹어진 노래는 잠든 아이의 옅은 심장 소리와 결을 같이하듯 잔잔하게 흘렀다. 하지만 훗날 소프라노나 테너가 부른 ‘자장가’를 듣다가 깜짝 놀랐다. 테너가 서양식 성악 발성으로 음악회장을 가득 채우며 부른 ‘자장가’는 더는 잔잔한 노래가 아니었고, 자장가에 스며 있는 밤의 소리도 아니었다. 오늘날 윤학준‧최진‧이원주‧김효근 등의 작곡가들이 발표한 2000년대의 한국 가곡이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과거의 이러한 풍을 벗어버리고 대중과 쉽게 호흡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노래’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음반에 담긴 천지윤의 해금-노래는 성악가들의 노래와 달리 자연스러운 흐름과 공기를 품고 있다. 성악가들의 목소리에서 나오는 ‘열기’보다, 천지윤이 쥔 두 현 사이로 숨 쉬는 ‘온기’를 통해 김순남과 윤이상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 온기는, 정치적 ‘냉기’로 인해 멀어졌던 두 작곡가를 일상의 음악으로 끌어오는 ‘온기’이기도 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월간객석 편집장)
해금으로 불러본다.
잊었던 마음으로 김순남을
고귀한 희망으로 윤이상을
몇해 전, 공연차 일본 요코하마에 갔다. 멀리 연주여행을 떠나면 깊이 묻혀 있던 생각들이 튀어 오르게 마련이다. 낯선 도시에서 홀로 사색할 시간. 적막한 호텔방에 누워 뒤척이다 문득 떠오른 것은 김순남의 노래였다. 김순남의 산유화, 진달래꽃, 자장가를 들어본 것은 오래 전이었다. 수줍은 듯 담담했던 그 노래를 해금으로 연주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오래 전 일이다. 이리저리 부유하던 생각이 여러 방향으로 꼭지를 쳐가며 그물망을 이룬다.
“김순남의 노래로 새로운 음반을 만들어보자.” 요코하마에서 기타리스트 박윤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그물망에 얼기설기 건져 올린 아이디어를 전했다. 한국의 전설로 남은 천재 작곡가 김순남(1917~1983)의 가곡을 소재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볼 것, 해금을 중심으로 기타와 클라리넷의 트리오 구성해볼 것 등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김순남의 가곡들을 조사했고 김순남에 관한 서적을 모아 읽어보기 시작했다. 박윤우는 편곡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프로젝트에 관해 논의하던 중 윤이상(1917~1995)까지 범위를 확장하게 되었다. 윤이상은 김순남과 동년배이고, 한국을 떠나 세계무대에서 활약한 작곡가이다. 김순남은 일찍이 일본과 러시아에서 인정받았다. 러시아의 하차투리안에게 “조선에 이러한 천재 작곡가가 있다니 놀랍다”라는 찬사를 받았고, 윤이상은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예프와 같은 대가들에게 인정받으며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에 문화축전 개막작으로 오페라 ‘심청’을 올릴 정도로 유럽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세계무대에서 ‘Isang Yun’이라는 이름으로 확약한 그의 음악적 입지는 견고하다.
하지만 김순남과 윤이상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 속에 북한과 연루되기도 했다. 김순남은 월북했고 북한에서 문화예술계의 정치적 우두머리를 맡았다가 일찍이 물러났다. 이후 그의 예술적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윤이상은 베를린에 있을 당시 동백림사건에서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탄원으로 사형을 면했지만,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을 밟지는 못했다. 두 작곡가가 남긴 음악의 색채가 확연히 다르듯 삶의 행방 또한 다르다.
서양음악‧재즈 그리고 국악이 함께 하는 교차로에서
약 3년의 작업 끝에 김순남과 윤이상의 가곡을 담은 음반을 동시 발매하게 되었다. 김순남의 노래는 해금과 기타·클라리넷으로, 윤이상의 노래는 해금과 피아노로 구성하였다. 이번 작업은 개인적으로 유년기부터 사랑하고 들어온 서양 음악, 10대 시절에 입문하여 익혀온 한국의 전통음악과 나의 해금, 20대의 시간을 함께해온 재즈가 만나는 교차로이다. 그간 오래도록 품고 있었던 음악들이 우러나와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재즈와 서양음악에 능통한 박윤우(작곡‧기타), 클라리넷(여현우), 조윤성(작곡‧피아노)과 함께 했다.
내 생애 어떤 지점에서 소환해 낸 김순남과 그와 자연스레 연결고리가 이어진 윤이상. 두 사람은 내 음악적 발걸음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김순남은 내 마음에 스민 상처와 아픔을 끄집어 내고 깊은 위로를 건넨다. 내 안에 고인 눈물을 게워내게 하는 치유의 노래인 셈이다. 윤이상은 그의 생애로 증명한다. 보다 넓은 세계를 꿈꾸라고 응원과 희망을 건넨다.
두 작곡가와 나눈 내면의 교류는 나의 해금을 통해 무언가(無言歌)가 된 것 같다. 순도 높은 소리의 세계는 언어보다 명징하다. 언어가 갖는 힘이 ‘구체성’이라면 언어가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광활한 ‘상상력’이다. 나의 소리로 명징한 감동과 광활한 상상력을 선물해드릴 수 있다면 더없는 보람일 것이다.
잊었던 마음, 김순남의 노래
‘월정명(月正明)’(Track 5)은 달을 노래한 전통 시조지만, 이 음반 안에서는 자장가로 들리기를 바랬다. 해금이 가곡의 원선율을 그대로 연주하되 기타와 클라리넷의 연주가 더해져 새로운 음악이 되었다. 아이를 안고 집 앞을 서성이며 둥가 둥가 잠을 재우던 날들을 생각하며 연주했다.
‘산유화’(Track 1)는 여백이 많은 한국회화를 보는 듯하다. 가사는 “꽃이 피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와 같이 단순하고 소박하다. 이 노래가 주는 맑은 울림은 가히 놀랍다. 어느 깊은 산사에 앉은 듯, 맑고 신묘한 공기 속에 앉은 듯, 시공간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기타는 거문고나 가야금을 뜯듯 드문드문 연주하고, 클라리넷은 대금이나 피리가 지저귀듯 새소리를 내기도 한다. 해금은 홀로 부르는 노래처럼 고요하고 사심 없이 연주해야 마땅하다.
‘진달래꽃’(Track 2)은 김소월(1902~1934)의 시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노랫말을 담고 있다. 이별가다. 비교적 담담히 부르는 이 노래는 한국 민요의 느낌을 담고 있기도 하다.
‘잊었던 마음’(Track 6)도 김소월의 시를 담고 있다. “어찌하여 옛날의 꿈조차 함께 오는가, 쓸데도 없이 서럽게만 오고 가는 맘”으로 부르는 노래는 어딘가 모르게 비장하고 웅장하다. 그리운 마음은 때로 비탄으로, 분노로 그 형태를 바꾸기 마련이니까. 현대음악적인 색채를 담고 있어 다른 곡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김순남은 혼인 후 홀로 월북했다. 남한 땅에 새 생명의 씨앗을 남겨 놓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딸을 그리며 만든 ‘자장가’ 1번(Track 3)과 3번(Track 7)에는 처연한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이별가에 가까운 비가(悲歌)의 느낌이다.
고귀한 희망의 편지, 윤이상의 노래
김순남의 가곡에 어린 슬픈 정서와 다르게 윤이상의 가곡에서는 희망과 낙관을 발견하게 된다. 윤이상이 고른 노랫말은 박목월(1916~1978), 조지훈(1920~1968), 김상옥(1920~2004)의 시다.
‘그네’(Track 1)은 “어룬님 기두릴까 가비얍게 내려서서, 포란잠 빼어 물고 낭자 고쳐 찌른 담에, 오지랖 다시 여미며 가쁜 숨을 쉬도다’라는 김상옥의 동명 시가 가사다. 꿈속에서 만난 선녀를 그리듯 환상적이고 아스라한 이미지가 그려진다.
‘고풍의상’(Track 2)은 “고와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 지고,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화안이 밝도소이다. 열두 폭 긴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라는 조지훈 시 ‘고풍의상’의 시가 가사가 되었다. 가사처럼 화려하고 고귀한 느낌을 준다.
‘그네’와 ‘고풍의상’에서는 화려함과 고귀함을 담은 이미지가 다채로운 사운드로 그려지기를 바라며 연주했고, 실제 연주할 적에는 나 역시 귀한 사람이 된 듯, 기품 있는 의상을 입은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신기한 일이다.
‘달무리’(Track 3)의 원곡에는 다소 쓸쓸한 감성이 담겨 있다. 하지만 드뷔시나 라벨이 그려낼 법한 마법적인 사운드로 재해석해보았다. 편곡과 피아노 연주를 조윤성의 마법 덕분에 마치 인상주의 화가들이 펼쳐낸 밤의 정경처럼 달빛이 흐르는 물 위에 떠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깊은 밤, 달빛과 물빛의 향연인 셈이다.
‘나그네’(Track 4)는 박목월의 시를 가사로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가 나온다. 원곡에서는 ‘나그네’의 담담한 설움이 느껴지지만, 새롭게 편곡하면서 도전정신을 갖춘 ‘개척자’의 마음으로 그리고 싶었다. 음악 속의 그는 과거를 깨끗이 잊고 새로운 출발점에 선다.
작업 기간 동안 윤이상의 아내인 이수자가 쓴 ‘내 남편 윤이상’(1998)과 작곡가가 아내와 주고 받은 서간모음집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2019)를 곁에 두고 읽었다. 평생 서로를 사랑하고 보살핀 부부의 삶을 들여다보며 사랑이란 어렵고도 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모든 발걸음을 응원한 아내 덕분에 윤이상은 ‘나그네’가 아닌 ‘개척자’로서의 영예로운 삶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물로 남은 편지에 담긴 사랑을 모티프로 조윤성에게 ‘La Memoria de Yun Isang’(Track 6) 작곡을 의뢰하여 음반에 담았다.
‘편지’(Track 5)는 “비 오자 장독대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와 같은 살뜰한 마음을 담은 김상옥의 시를 가사로 했다. 그리움의 농도가 절망이나 비극을 향해가지 않는 균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김순남과 다른 지점이다. 한국 전통장단 중 하나인 칠채를 응용하여 리듬의 역동성을 담았고, 해금과 피아노가 유니즌으로 연주하는 부분이 화려함을 선사한다.
‘새야, 새야’(Track 7)는 같은 노래의 민요를 모티프로 작곡한 것이다. 한 마리의 새가 비상하듯, 넓은 세계로 나가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연주해본다. 윤이상은 삶의 고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달성했다. 윤이상의 삶에는 고난도 많았지만 영광의 순간도 많았다. 그의 넓고 강인한 세계관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전한다. 이 음악에 희망과 드넓은 세계관이 담기기를 바랬다.
서재에서
2021년 11월 3일
천지윤
잊었던 마음 | 다시, 김순남
Executive Producer & Haegeum 천지윤
Producer / Arrangement / Guitar 박윤우
Clarinet 여현우
Recording 이정면, 정새롬 (이음 Studio)
Mixing & Mastering 홍지현 (스튜디오 세나클)
편지 | 다시, 윤이상
Executive Producer / Haegeum 천지윤
Producer / Arrangement / Piano 조윤성
Recording 이레스튜디오
Mixing & Mastering 홍지현 (스튜디오 세나클)
Album Design Studio D. 박재영
Photography R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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