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Xeuda) [꿈, 칼, 숨]
이 앨범은 신화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신화를 읽고 쓴 저의 감상문입니다. 신화 속 인물이 되어보고자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오히려 그것이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입체적인 성격과 개성을 읽어내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저와는 다르게 당차고 익살스러워 그 마음에 동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저는 역시 그냥 저의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그들이 될 순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제가 괴로움에 파묻혀있던 밤에 살며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하지 못했던 생각과 말로 저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저는 그 밤의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지금부터 소개할 신화 속 여성들은 각자의 자아와 각자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삶에 그들의 일부만 잠시 초대했을 뿐, 앨범에 수록된 노래와 신화 속 주인공은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잠시 제 삶에 들어와 용기를 빌려준 신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꿈, 칼, 숨]
#1 꿈
꿈을 꾼다. 불안으로 가득 찬 몸과 마음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도망치고 싶다.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2 칼
칼을 든다. 언제나 나에게 향하던 칼을 밖으로 돌려본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상상한다. 저지른다. 토해낸다. 뱉어낸다. 그리고.
#3 숨
꿈을 꾼다. 눈을 감고 아무 소리나 내본다. 나를 억누르고 있던 것들이 점차 사라진다. 고요함이 남는다.
[만든 이들 Credit]
제작 Produced by 쓰다 Xeuda
작사, 작곡 Composed and written by 쓰다 Xeuda
편곡 Arranged by 쓰다 Xeuda, 박진호 Jinho Park
믹싱, 마스터링 Mixed & Mastered by 박진호 Jinho Park
녹음 Recorded by 박진호 Jinho Park (@CTRSOUND), 민상용 Sangyong Min (@studioLOG)
연주 Performed by
#1 꿈 Dream
쓰다 Xeuda (노래 Vocal)
김명환 Myeonghwan Kim (일렉기타 Elec guitar)
박관우 Kwanwoo Park (베이스 Bass)
양재혁 Jaehyuk Yang (드럼 Drums)
#2 칼 Blade
쓰다 Xeuda (노래 Vocal)
박진호 Jinho Park (어쿠스틱 기타 Acoustic guitar, 코러스 Chorus)
김명환 Myeonghwan Kim (일렉기타 Elec guitar)
박관우 Kwanwoo Park (베이스 Bass)
양재혁 Jaehyuk Yang (드럼 Drums)
이슬 Lee Seul (국악 Vocal)
이영 Lee Young (가야금 Gayagŭm)
#3 숨
쓰다 Xeuda (허밍 humming)
이슬 Lee Seul (허밍 humming)
권영진 Youngjin Kwon (피아노 Piano)
앨범디자인 Photography & Artwork by 최예영 Yeyoung Choi
헤어/메이크업 Hair & Makeup by 유선영 Sunyoung Yu
신화 해석, 자문 Narrative consultation 황예지 Hwang Yezi
“본 앨범은 2021 아르코청년예술가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제작하였습니다.”
#1 감은장아기 이야기
감은장아기의 아버지 이름은 윗상실, 어머니 이름은 아랫상실이다. 윗상실 아랫상실 부부가 처음 만난 건 풍년으로 시절 좋던 때, 어느 따뜻한 아랫녘 남쪽 지방에서였다. 집도 없이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던 두 사람은 천상배필 부부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금세 아이가 생겼는데, 첫 번째 낳은 것이 은장아기, 두 번째 낳은 것이 놋장아기였다. (중략) 부부는 마지막으로 딸을 하나 더 낳았는데, 그 딸을 감은장아기라고 이름 지었다. 감은장아기가 자라며 집안은 점차 부유해졌다. (중략) 그리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하루는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윗상실과 아랫상실은 집 안에만 머물렀다. 윗상실과 아랫상실은 몹시도 심심하여 큰딸 아기를 불러 질문을 하나 했다.
"너는 누구 덕분에 이리 잘 사느냐?" 큰딸 아기가 답했다.
"하늘님과 지하님, 아버지, 어머니의 덕입니다."
윗상실과 아랫상실은 딸의 답에 만족하며 "내 자식이 분명하다.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라고 말했다. (중략) 부부는 둘째 딸 아기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둘째 딸아, 너는 누구덕에 이리 잘사느냐?"
"하늘님의 덕이자, 지하님의 덕이자, 아버지의 덕이자, 어머니의 덕입니다."
이번에도 몹시 만족한 윗상실과 아랫상실은 "내 자식이 분명하다.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라고 말한 뒤 막내딸 감은장아기를 불러 물었다.
"감은장아기 들어오라. 네게도 물어보자. 너는 누구 덕에 이리 잘 사느냐?"
"하늘님의 덕이자, 지하님의 덕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덕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저는 배꼽아래 선실금이, 제 팔자 덕입니다."
- 황예지 안유리 최가연, 『아무달 아무날』, 감은장아기 이야기, 담담(2019), p18~19.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안에 떨었던 적이 있다. 자기 확신이라는 거창한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잘 해낼 수 있을지 내 생각이 맞는지 옳고 그름의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을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때 문득 감은장아기가 생각이 났다. 나의 상상 속에 나타난 감은장아기는 집안의 덕이 누구의 덕인지 묻는 부모님을 향해 무척 건조한 얼굴과 목소리로 "제 팔자 덕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으로. 그냥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마음으로.
감은장아기가 말하는 ‘내 덕’은 뭘까 생각해 본다. 나의 뛰어남일까, 잘난 능력일까? 아니. 어쩌면 그냥 ‘나’라서. 존재하는, 존재로서의 나이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잘나서 집안이 잘 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있어서. 나의 존재가 여기 있어서 이 집안이 잘 된 거라고 말한 건 아닐까?
완벽하려고 하는 마음. 잘나려고 하는 마음. 그러지 못해서 좌절하는 마음들은 자꾸만 나를 더 불쌍하게 만든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나는 그대로 나이고, 나라서 나다. 그냥 내 팔자 덕에, 그냥 내 존재 덕에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눈앞의 불안이 우습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지. 이게 나인걸. 잘 되던 못 되던 그저 다 내 팔자 덕인 걸. 이 쉽고 또 어려운 사실을 대체 언제쯤 나는 깨닫게 될까.
# 2 자청비이야기
그제야 자청비는 자신이 정수남이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자청비는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고 내가 이놈에게 속았구나, 자칫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 이놈을 잘 달래야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중략)
"정수남이야, 내 옷 가져다 다오."
"허면 대신 애기씨 가슴이나 한 번 만져봅시다."
자청비는 다시 분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정수남이를 달래며 말했다.
"돌아가면 내 방에 있는 은당병을 줄 테니 옷을 다오. 내 가슴 만질 바에는 은당병에 혀를 넣는 것이 더 좋을게다."
그러자 정수남이는 자청비의 옷을 내어주었다.
돌아갈 길은 먼데, 점점 날은 저물어만 갔다. 날이 어두워지자 자청비는 꾀를 내어 정수남이에게 말했다.
"정수남이야, 저 동산으로 가자. 가서 움막이나 지어 너랑 나랑 끌어안고 밤을 새고 가자" (중략)
"정수남이야, 종하고 한 집에서 같이 자면 하늘님이 보아서 죄가 많아진다. 그러니 하늘님이 못 보도록 이 담 구멍을 다 막거라." (중략)
밤새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동이 트고 날이 밝아왔다. 정수남이는 자신이 자청비에게 속은 것을 알고 화가 나서 자청비를 죽일 듯 몰아갔다. 자청비는 또 다시 꾀를 내어 잔뜩 성이 난 정수남이를 살살 달래며 말했다.
"정수남이야, 이리 오너라. 내 죽기 전에 네 머리에서 이나 잡아주마." (중략)
잠든 정수남이를 보자 자청비는 화가 치밀어 혼잣말을 하며 성을 내었다.
"이 못된 자식. 종놈이 나를 조롱하며 속이고도 내 무릎에서 잠을 자다니! 어찌 이럴 수 있느냐!"
잔뜩 성이 난 자청비는 담뱃대를 빼들어 정수남이의 왼쪽 귀를 힘껏 찔렀다. 그러고는 오른쪽 귀로 담뱃대를 빼내어 정수남이의 목숨을 끊어버렸다.
- 황예지 안유리 최가연, 『아무달 아무날』, 자청비이야기, 담담(2019), p109~111.
나는 항상 나를 먼저 의심하고 돌아본다. 같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혹시 내가 잘못한 건 아닐까? 내가 여지를 주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은 결국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나에게로 돌아온다. '내 잘못이 아니야'라고 억지로 생각해야지만 겨우 조금 살아질 뿐이다. 그런데 내가 만난 자청비는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비단 정수남이를 죽인 일화뿐이 아니라, 자청비가 사랑했던 문도령을 만나기 위해 꾀를 부리고 거짓말을 일삼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랬다. 나는 삶의 매 순간 주저하고 두려워하는데 자청비는 정말 한순간도 그러는 법이 없다.
내가 쥔 칼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내 삶을 가로막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 앞에서 나를 믿고 나의 행동을 믿고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다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아니 내가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또 생각이 많던 밤. 내 상상 속 자청비가 나타나 익살스러운 얼굴로 내게 칼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속삭였다. 나는 언제나 나를 향해있던 칼을 고쳐잡고 가장 먼저 떠오른 그 사람들에게 향해 걸어갔다.
#3 동명국 따님애기 이야기
동명국 따님애기가 태어나고 한두 살이 되던 해, 동명국 따님애기의 부모의 몸에 불효가 났다. 이에 부모는 동명국 따님애기가 일곱살이 되던 해에 무쇠장이를 불러다가 무쇠 뒤주를 짰다. 그 뒤주에 젖이 담긴 은으로 만든 병을 넣고, 은 같은 마마 금 같은 마마를 물려준 뒤 동명국 따님애기를 집어 앉혔다. 그렇게 부모는 동명국 따님애기가 담긴 뒤주를 일흔여덟 개의 자물쇠로 단단히 잠가 바닷물에 띄워, 동해 용왕에게로 멀리 밀어버렸다.
동명국 따님애기는 어둡고 좁은 뒤주 속에 앉아서, 물 아래로 삼 년, 물 위로 삼 년을 동글동글 흔들흔들 떠다니며, 동쪽 바다의 들 물결과 서쪽 바다의 썰 물결을 이리저리 가르며 지냈다. (중략)
"안타깝고 불쌍한 일이로다. 너는 이제 저승할망으로 들어서거라."
이 말에 동명국 따님애기는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동명국 따님애기는 지금까지의 차분한 태도를 버리고 노하여 되물었다. (중략)
"아무리 말하여도 너의 태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아흐렛날에 태어났으니 저승 할말이 되는 수밖에는 길이 없구나. 허니 이제는 옥황상제님의 북단명 꽃을 네가 차지하도록 하여라." 태생을 고칠 수는 없음에 동명국 따님애기는 한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습니다."
- 황예지 안유리 최가연, 『아무달 아무날』, 동명국 따님애기 이야기, 담담(2019), p67~68.
텅 빈 혼자의 시간. 아무 소리나 내본다. 되는대로 흥얼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린다.
뒤주 속에 갇혀 바다 위를 떠돌았던 동명국따님애기.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저승할망이 된다. 죽음이 주는 고통과 분노, 상실, 슬픔을 모두 지고 간 동명국따님애기의 고요한 울음이 닿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