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 사무치는 이름에 부쳐
이제니
마음이 춥고 어두울 때 찾게 되는 위안의 장소들처럼 강아솔의 목소리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서게 될 때마다 다시 돌아가 듣게 하는 어떤 힘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울지 않으면서 울고 묻지 않으면서 묻고 답하지 않으면서 답한다. 나는 오래도록 그 목소리를 따라들으며 그 담담한 단단함이 어디서부터 연유한 것인지 묻곤 했다.
이번 앨범에서 강아솔은 충무라는 유년의 바다로 우리를 데려간다. 더는 같은 지명으로 불리지 않는, 두 팔 벌려 안아주던 할머니도 이제는 없는. 그 시절의 시간과 공간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유년에는 말할 수 없는 신비가 덧대어져 있어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불쑥 선명한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렇게 다시 그 시절 앞으로 돌아가게 될 때 우리는 문득 나이를 먹는다.
살아간다는 일은 다 무엇일까.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수없이 반복해서 겪어내면서 사람들은 알게 된다. 슬픔이란 세월에 의해 단련된 채로 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무엇이 아니라 매번 아프게 앓으며 다시금 받아들여 껴안아야만 하는 처음의 감정이라는 것을.
강아솔은 늘 그렇듯 어떤 슬픔과 상실 앞에서 섣부른 위안을 건네지 않는다. 그저 그 자신의 목소리로 가만히 읊조리듯 노래할 뿐이다. 나도 당신과 같은 그리움을 품고 있다고. 이제 더는 볼 수 없는 사람과 함께 더욱더 깊어지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을 살아가고 있다고. 무엇으로도 부를 수 없어서 그저 충무, 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유년의 바다를 데려오면서. 같은 듯 다르게 반복되면서 흘러가는 그 바다처럼 우리의 삶도 같은 듯 다르게 매순간 흘러가고 있다고. 헤어진 사람들은 그 끝에서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고 싶어서 믿는 마음으로 강아솔의 노래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잃어버렸던 유년의 바다를 어느 날 우리가 되찾듯이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전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마찬가지로 이 현재에 자신의 미래를 끌어와 미리 살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꼭 불교적 윤회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에서 기쁨도 슬픔도 그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슬픔도 불행도 그것 그대로 받아 안을 힘이 우리에게는 있는 거라고. 우리의 마지막은 무한히 흐르는 물결처럼 끝내 괜찮아질 거라고.
그리움을 품고 있는 이들에게 말을 건넬 때 강아솔의 목소리는 그렇게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깊고 의연하게 맺혀간다. 어떤 슬픔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삼키면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입안에 고요히 머금고 있는 채로. 따뜻함과 굳건함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은 채로 우리 속에 이미 있다고 말하는 그 위안에 머무르고 싶어서 어느 어두운 밤에 나는 다시금 강아솔의 노래를 곁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