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함께 무르익은 노래들
어김없이 일상에 녹아든 빅 베이비 드라이버의 [Leftover]를 중심으로 가볍게 산책하거나 책을 읽을 때 들을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너무 무겁지 않은 노래들은 연락이 뜸해져도 마음 통하는 오랜 친구처럼 안락하다.
[Remainder]는 [Leftover]를 잇는 또 하나의 미니 앨범이다. 지금껏 공개하지 않았거나 새로 작업한 다섯 곡을 담았다. 이로써 2022년 상반기에만 열 개의 새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됐다.
미니 앨범 발매 이후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꾸준히 공연해온 재미공작소에서 쇼케이스를 열고 여수MBC ‘박성언의 음악식당’ 3주년 콘서트에 참여했다. 5월까지 이어진 [Remainder] 작업도 무사히 마무리했다.
[Leftover], [Remainder]를 나눈 건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 됐다. 특별한 기준 없이 시작한 선곡은 각 앨범을 대표하는 톱 트랙 ‘Where Do We Go’, ‘O’로 방향성이 생겼다. 멜로디를 강조한 팝, 록 사운드에 유머를 더한 [Leftover]와 달리 [Remainder]는 복고적이고 블루지하다.
예상과 달리 낮고 조용한 ‘O’가 느리게 흐른다. 짧게 반복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소리에 집중한다. 살짝 잡음 섞인 엘피,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오래된 노래가 생각난다. 아톰북 앨범 [Warm Hello from the Sun]에서도 들을 수 있으나 새 노래로 봐도 무방하다. 예전 레코딩을 참고하지 않은 뉴 버전은 세월과 함께 무르익었다. 서두르지 않고 하나둘 성취해가는 음악가 행보를 닮은 기념비적인 노래로 앨범의 방향을 암시한다. 훗날 누군가 선곡을 부탁할 때 주저 없이 고를 노래가 추가됐다.
오래된 포크 록, 슬로코어 등을 많이 듣던 시기에 만든 ‘Useless & Helpless’는 ‘O’만큼 오래된 노래다. 정규 2집 [A Story of a Boring Monkey and a Baby Girl] 데모로 만들었으나 앨범엔 넣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남겨둔 노래는 2022년 여름 초입에 빛을 보게 됐다. 어쿠스틱 기타에 실린 나긋한 보컬과 오르간 소리가 아름답다. 새 앨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내심 기대했던 사운드다.
키보드, 밴조를 가미한 ‘White Sneaker Boy’의 흐름은 완만하다. 바쁜 현대인이 갈망하는 ‘게으른 하루’의 BGM으로도 손색없어 보인다. 이야기를 건네는 듯한 보컬, 소박한 연주가 어우러진 블루스로 다양한 편곡을 기대하게 한다.
신시사이저 활용이 눈에 띄는 ‘여름의 끝’은 4분 22초가 유독 짧은 듯한 느리고 절제된 노래다. 본래 ‘Come Over’라는 제목의 인디 팝이었으나 미니 앨범을 구상하며 한글 가사를 만들었다. 언제든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공간이 떠오른다.
세 번째 정규 앨범 [사랑]에서 사정상 빠진 첼로 편곡과 세 개의 미발표곡을 더한 미니 앨범 [사랑, 끝이 없네] 펀딩에 참여했다면 시디로만 들을 수 있는 ‘우리, 함께, 어디론가, 떠나요’를 기억할 것이다. [Remainder]를 마무리하는 ‘우리, 함께’는 새로 작업한 버전으로 한결 블루지한 밴드 사운드를 선사한다. 참고로 5~6년 전 빅 베이비 드라이버는 외로운 사람들 이야기를 그려낸 단편영화 ‘가까이’ 음악을 맡았는데 ‘Alone, Together’라는 영어 제목이 노래와 우연히 겹친 게 흥미롭다. (영화는 이주영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노랫말을 음미하며 감상하면 여운이 더 깊다.
[Leftover]를 들으며 봄을 기다렸고 조용히 머무르다 지나간 봄을 돌아보며 [Remainder]를 듣는다. 시대 변화를 함께 체감할 수 있는 음악가의 ‘아카이브 시리즈’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미니 앨범 두 장을 발표한 빅 베이비 드라이버는 솔로, 밴드로 많은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Leftover], [Remainder]를 합친 특별한 바이닐도 제작한다. 일상 회복 과정에서 만난 반갑고 편안한 노래들을 더 많은 분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