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인 [Spells]
물론이다. 바다에 나가 몇 년을 사는 사람도 있다. 우주에 나가 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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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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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Spells]가 코스모스 슈퍼스타가 아닌 한정인의 앨범이라는 건 첫 트랙 “Extra”에서부터 분명해진다. 멀고 먼 밤하늘을 건너온 별빛들처럼 반짝거렸던 2021년 여름의 싱글 버전 “Extra”에 담겨 있던 소리들은, 3키만큼 내려간 음정과 함께 어둠 속에서 말없이 서 있는 가로등들의 빛으로 변해 있었다. 여전히 처연한, 하지만 부드러운 궤적을 남기는 이이언의 목소리와 대구를 이룬 한정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중력을 거스르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켜켜이 쌓인 사운드의 안개 속에 차분히 가라앉는다. 그 침수한 소리들 속에서 다시 ‘우리 나름의 끝이 필요’하다는 노랫말을 듣는 일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루어 왔던 마무리를 직시하는 순간의 납을 삼킨 듯한 기분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시작을 고한 끝은 앨범 내에서 그 모습을 달리한 채로 간헐적 반복을 거듭한다. 아무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일과 아무도 걸지 않는 전화번호. (“BadLuckBallad”) 불타 버린 마음과 노래들과 터전과 기억과 그 재가 날리는 축제의 밤. (“차라리” – “Festival”)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모질고 심한 말의 끝. (“Borderline”) 영혼을 찢어내고 가슴을 산산조각내고 떠나버린 루크와 릴리. (“The Boy Named Luke and Girl Named Lily”) 졸업식. (“나나의 졸업식”)
이 끝들이 불가능한 영원을 노래하던 [Eternity Without Promises]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2019년의 EP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도 꿈결처럼 부유하는 신시사이저와 맑고 투명한 목소리 속에 켜켜이 배어들어 있던 슬픔, 그리고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이었으니까. 한정인의 음악이 슬픔과 멀리 떨어져 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Spells]는 그다지 아름답지도, 무던하게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쉽지도 않은 끝을 보다 분명하게, 그리고 한정인이라는 사람의 경험과 가까운 위치에서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아프다.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는 경험은 속이 시원하냐는 고함소리와 교차하고(“슬픔의 맛”) 듣고 말하고 듣고 말해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초인종을 눌러 줄 사람도 없는 밤은 반복된다(“Listen and Repeat”). 그는 지금 지상에, 땅 위에 있다. 아마도 우주보다 슬픔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곳에.
그렇지만 나는 이 모든 끝을 섣불리 ‘단절’과 등치시키고 싶지 않다. 그 심정은 일렉트로팝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영역을 누비고 있는, 그리고 마음 속에서라도 춤을 출 수밖에 없게 만드는 [Spells]의 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강해진다. [Spells]에서 귀를 사로잡는 순간들은 결코 어둡지 않은, 그리고 마음 속으로 어렵지 않게 녹아드는 전자음과 목소리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건 여전히 한정인의 음악이다. 다만 보다 정교해진 음악. “Wallflower”와 “슬픔의 맛”, “나나의 졸업식”에서 짜릿할 정도로 고음부가 강조된 신시사이저의 멜로디가 단번에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는다면, “Listen and Repeat”와 “Festival”의 베이스라인은 담담하게 노래하는 목소리에는 담을 수 없을 마음의 울렁거림을 저 아래에서 형상화한다. 단단한 비트와 반짝거리는 사운드 조각이 결합한 “Borderline”과 “The Boy Named Luke and Girl Named Lily”은 커다란 변주 없이도 집중력 있는 그루브를 만들고, 이와는 반대로 변주와 확장을 거듭하며 대장정에 나서는 “One Second Time Machine”과 “묵시록”도 있다.
사운드의 결의 측면이든 송라이팅의 견고함이란 관점에서든 ‘정교함’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Spells]의 곡들은,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로 인하여 정돈되기보다는 더 날뛰는 듯한 역동 속으로 나아간다. 때로 남의 발을 밟아 버리는 춤처럼, 이제 됐냐고 속이 시원하냐고 외치는 목소리처럼, [Spells] 속에 담긴 소리의 파편들은 자신을 안정 속에 안치시키기보다 금방이라도 자신이 올라탄 선을 벗어날 것처럼 진동하고 엉뚱한 곳에서 출몰한다. 그럴 수 있는 걸까? 내가 이상하게 듣고 있는 건가? 근데 슬픔이란 것이 좀 그렇지 않나? 너무나도 분명하게 마음을 이지러뜨리지만 동시에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순간에 어이없는 구석에서 불쑥 나타나 버리는. 단절되지도 잊히지도 않고 연속되지만 다만 어떤 마무리를 지을 수는 있는. 그 마무리가 주문의 형태라고 할지라도. 그 끝이 음악의 형태라고 할지라도.
많은 음악가들이 슬픔이라는 모순된 감정의 맛을 함부로 자신할 수 없다는 걸, 그 감정이 단조의 우수 어린 목소리로만 표현되는 평면차원은 아니라는 걸 내게 알려 주었다. 요 라 텡고Yo La Tengo와 심Seam,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와 피쉬만즈Fishmans가 그랬고, 물론 코스모스 슈퍼스타도 그걸 내게 알려 줬던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Spells]에서 한정인이 선언하는 단절 아닌 끝을, 정교하고 선명하기에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지상에서의 가능성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아마 이 앨범을 듣는, 그리고 이 안에 있는 슬픔을 느끼는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상심한다. 사랑하면 모른 척할 수 없다. 사랑하면 회피할 수 없다. 사랑하면 무책임할 수 없다. 사랑하면 변명할 수 없다. 사랑하면 거짓말할 수 없다. 사랑하면 금세 말을 바꿀 수 없다. 사랑하면 재빨리 모습을 바꿀 수 없다. 사랑하면 더 빨리 갈 수 없다. 사랑하면 모를 수 없다. 모르는 것은 사랑하면 폭력이 된다. 아는 것은 사랑하면 허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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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사랑하며 살지 않는 사람보다 적다. 언제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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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는 세상을 움직이고 소수는 세상을 바꾼다. 언제나 그랬다.
- 유진목, [산책과 연애]
-정구원 / 음악비평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