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당(錦堂)에 깃들다
박종선 선생님을 처음 뵌 건 1979년 고3 예비고사 끝내고 검은 교복을 입고 무작정 광주 시립국악원을 찾아간 때였다. 퉁소를 배우러 왔다고 했더니 안치선 원감 선생님이 옆에 계시던 박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다. 박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대금 산조 한 가락을 불어주셨다. “이거 말이냐?” 이미 가슴에 꽉 차게 들어온 대금 소리가 빠져나갈까 봐 가슴을 감싸 쥐며 “네. 바로 그거, 그것 좀 가르쳐 주십시오.” 정말 간절하였다. “그럼 본고사도 남았으니 대학 합격하고 오너라. 그때 시작하자.” 그길로 열심히 본고사를 준비하였고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나오자마자 시립국악원으로 달려갔다. 그때부터 박종선 선생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1981년 9월 선생님께서 서울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단원으로 올라가실 때까지, 거의 날마다 가서 대금과 아쟁을 배웠다. 그 뒤 나는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을 거쳐 1999년 8월 드디어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에서 선생님과 음악을 같이 하게 되었다. 선생님을 뵈어온 지 20년 만이었다. 그 뒤 선생님은 퇴직하시고 처음 뵈었던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사제의 연을 이어오고 있다.
박종선 선생님의 호는 금당(錦堂)이다. 비단 금(錦)에 집 당(堂). 비단으로 두른 집. 부드럽고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박종선류 아쟁산조가 그렇다. 그윽하고 묵직하다. 선생님의 성품 또한 그러하다. 평생 많은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재주를 뽐내지 않고 그저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며 아쟁만을 연주하셨다. 그 성음 좋은 대금도, 거문고도, 호적도, 북, 장구도, 흥타령도 아쟁을 위해 놓으셨다. 그 멋있는 성음들이 모두 아쟁 가락에 녹아들었다. 내 나이 벌써 진갑이다. 우연히 박 선생님의, 지금의 내 나이 때 연주한 영상을 보았다. 온전히 한가락 한가락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올곧이 담아 가는 모습에서 내가 젊었을 때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동이 몰아쳤다. 그러다 이번에 임동창 선생님의 권유로 대아쟁으로 그 성음을 담아보았다. 아직 선생님의 성음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선생님이 더 연로하시기 전에 선생님께 바치는 헌정음악이라 생각하고 한음한음 정성을 다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건강하세요!”
2022년 2월 제자 김영길
음악은 신비롭다.
소리는 실체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실재한다.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듣는 사람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울게 하고 웃게 하고 위로하기도 하고 열정을 샘솟게도 한다.
가장 오묘한 것은, 그 무엇이 분명 연주자나 작곡자를 닮아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음악에 흐르고 있는 ‘그 사람됨‘을 만날 때, 우리는 짜릿하다.
이왕공(離王公) 김영길의 음악은 평온하고 겸손하고 성실한 그의 모습과 똑같다. 그의 평생의 스승, 박종선 선생의 음악과 결이 같다. 올곧고 그윽한 스승의 성음을 이데아로 지향하며 온화한 그의 성품대로 한발 한발 내딛어 왔다. 음악가 임동창 선생은 그런 두 사람 품성을 닮은 성음을 위해 청이 더 낮은 대아쟁으로 연주할 것을 제안했고 이 연주는 대아쟁으로 연주한 박종선류 아쟁산조 최초의 기록이다. 그래미어워드 2회 수상에 빛나는 레코딩 엔지니어 황병준이 대아쟁의 중후하고 풍부한 사운드, 자연스러운 공명과 텍스쳐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이왕공 김영길의 음악은 스승 금당 박종선에게서 왔고 금당 박종선의 음악은 우리의 수많은 조상들로부터 왔다. 이왕공 김영길이 그의 스승 박종선에게 헌정하는 이 음악은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신 조상들께 올리는 선물이기도 하다. [우락]레이블이 이 아름다운 헌사에 힘을 보태게 되어 기쁘고 영광스럽다.
-2022. 2. 24. 신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