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혁 [봉오리 시절]
“생동한 봄의 기운이 차오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잎이 메말라 떨어지듯 풀 죽은 날이 있기도 하다.
꽃과 계절이 그렇듯, 피고 지며 오고 가는 날들.
누구든지 어떤 순환 속에 있는 것이리라.
‘봉오리 시절’이라는 제목으로 노래들을 한 데 엮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의 상태인 봉오리의 모습을 보며
곧 꽃을 피우리란 기대를 품기도 하고,
끝내 피우지 못한 채로 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물음을 갖기도 한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새긴 흔적들을 모아둔다.
삶의 한복판에서 흔들거리면서도 걷고 싶은 열망이,
생을 끌어안으며 몸부림을 치던 것이 노래가 되어 남았다.”
작자의 말
[봉오리 시절]은 저의 지난한 시절을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의 모습에 빗대어 엮어낸 앨범입니다. 자연의 순리를 쫓아보고 싶었던 막연한 바람이 담겨 있지요. 이제껏 살아온 나날을 돌아보자면요. 생이 던지는 질문과 무게 앞에서 어찌할 바 몰라 허둥대고, 자꾸만 거듭 고꾸라지기 바쁘고, 자빠진 채로 어그러진 일상을 지내기도 하며,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가보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들이 떠올라요. 이 앨범은 서툰 걸음에 대한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 잠시 멈춰 선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선 자리에 디딘 두 발을 보며, 심겨진 곳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꽃과 나무를 떠올립니다. 때에 맞춰 고유한 빛깔을 내는 일에 대해 생각하며, 철 따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 자연의 모습을 봅니다. 풍경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던 이는 마침내 언어를 갖게 됩니다. 그렇게 만든 이야기를 갖가지 음으로 퍼뜨릴 때, 노래하는 이의 걸음은 비로소 한 시절을 뚫어낼 수 있을까요.
이 앨범은 곧 피워내리란 기대와 아직 피워내지 못했다는 불안 사이에 있던 저의 내밀하고 자전적인 고백이에요. 그런데 어찌 보면 비단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 이 노래들이 마땅한 곳에 닿아, 오래도록 누군가의 곁에 있을 만치 뿌리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어디론가 향해 가다가 우리가 마주치게 된다면, 그곳이 저 너머로 향하는 길목이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마주한 그날에 함께 발맞추어 걷는 장면도 그려보고요.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서로를 견뎌주는 꿈을 꿉니다. 음을 붙인 저의 고백이 당신의 어깨에 닿기를.
허정혁
프로듀서의 글
유튜브에서 허정혁을 치면 그가 5년 전에 부른 ‘계절따라’의 영상이 있다.
갈색 블레이저와 베이지 톤의 바지를 입고서 의자에 앉아 빛바랜 마틴 기타를 튕기고 있는 겨울의 나무처럼 건조한 사람이 있다. 그의 찡그린 진지한 얼굴 끝에 달린 콧대는 화면을 뚫고 나올 기세다. 자신의 목소리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내뱉으며 기타 줄과 닿는 양손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 옛날 한국의 포크를 기반한 대중가요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현재로 보내진 것 같은 남자. 사실 이 영상은 앨범 작업을 끝내고 우연히 보게 되었다.
2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위와 비슷한 인상을 갖고 천천히 정혁 씨의 데모를 막 들어보던 순간이 기억난다.
한편으로 ‘놀이터’, ‘새로운 길’을 듣고 있자니 예민 님의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같이 동화 같은 순수함을 희구하는 삶의 태도가 느껴졌다.
각자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내가 스케치한 편곡을 이리저리 들려주고 이야기를 나누며 정혁 씨가 자기 음악으로 보여주고픈 세계는 어떨 땐 내 생각보다 더 깊고(‘계절따라’), 더 어둡고(‘수풀’), 더 유려한(‘있어요’), 그러면서도 매우 친근한(‘천천히 조금씩’) 얼굴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봉오리 시절]일까? 정혁 씨와 함께 앨범의 제목을 참 오랫동안 고민했던 것 같다.
그중에 [봉오리 시절]은 정혁 씨가 나에게 프로듀서를 처음으로 제안했을 당시의 ‘가제’였다.
나는 정혁 씨의 노래들이 아직 솔로 뮤지션으로서 꽃을 피우기 전 언제가 될지 하염없이 기다리며 맺혀있던 꽃봉오리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영화음악과 이런저런 일을 하며 시간을 할애한 나를 믿고 기다려 준 정혁 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덧붙여 앨범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객관적인 시각과 기꺼운 마음으로 믹싱을 도와준 황현우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현우는 프로듀서 영역의 고민까지도 함께 나누고 많은 조언을 해줬다.
그의 노래들이 기약 없이 봉오리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을 함께 기울였다.
이제 막 꽃 피운 정혁 씨와 그의 음악이 앞으로 ‘어디론가’ 향하는 발걸음을 응원할 것이다.
김해원
1. 시절과 시절
어떤 흐름 가운데 놓여있는 인생의 부분을 짧은 노랫말로 그려낸다.
2. 창가에 앉아
아름다운 풍경과 그와는 대비되는 화자의 쓸쓸함이 비친다.
덩그러니 남겨진 마음 곁에 있었으면 하는 노래.
3. 풍선
자꾸만 되풀이되는 나날에 대한 노래.
의욕을 내봐도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4. 베짱이
어느 동화 속 주인공처럼 노래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는, 빈둥빈둥 게으른 생활을 이어 가는 인물의 이야기.
그가 보내는 늘어진 하루를 속속들이 경쾌하게 드러낸다.
5. 놀이터
기억 속 어딘가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어느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
어렸을 적 뛰놀던 장면을 떠올리며 쓴 노래.
6. 먼 바깥
빛이 겨우 드는 곳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머무르고 있는 걸까, 열망하고 있는 것일까.
7. 수풀
이리저리 뒤섞인 채로 계속 이어지는 삶을 우거진 숲에 빗대어 만든 노래.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로 생의 한가운데를 걷는다.
8. 누군가의 노래
어떤 굴레에 갇혀 사는 이의 심정을 옮겨 보려고 했다.
그럼에도 힘들여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가 서려있는 곡.
9. 계절따라
나름의 속도로 꾸준히 흐르는 계절을 보며 만든 노래.
때에 맞춰 움직이는 삶을 꿈꾸며.
10. 있어요
그저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아무 도리가 없는 사람, 듣는 이가 없을지도 모르는 고백.
11. 천천히 조금씩
겨우 한 치 앞만 내다보아도, 아주 느려도, 어찌 되어도 괜찮은 거라 이야기해주는 노래.
마음에 고이 담아두고 자주 꺼내어 보고 싶은 이야기.
12. 새로운 길
지금 여기로부터 저 너머로 이어지는 꿈.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안에서 시인이 품었을 소망과 의지를 헤아려 보며, 그 바람 위로 오늘의 걸음을 포개어 본다.
13. 어디론가
삶의 여러 장면을 다양한 풍경에 빗대어 나열한다.
일상의 풍경 위로 삶과 노래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흐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