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고수’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실험작
오세은은 ‘숨은 고수’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설명하기 위한 항목에 이런 이력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룹 사운드'에서 활동한 사실도 오세은의 음악사에서 주요 사항이기 때문이다. 1967년부터 72년경까지 성균관대학교 재학 시절 동안 오세은이 미8군 및 이태원의 클럽 등지를 거점 삼아 기타와 보컬리스트로 활동한 그룹들은 아이돌스, 플라워스, 영 바이블스, 라이더스, 메가톤(혹은 메가톤스) 등이다. 그의 그룹사운드 시절을 알 수 있는 음반은 거의 없지만(메가톤스 관련 앨범뿐이다), 포크 음악 위주로 발표된 솔로 앨범들에서 그의 이전 여정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1972년의 데뷔 음반 [오세은 스테레오 선곡집(그날이 오면/친구야)]은 분명 당시 성행했던 어쿠스틱한 분위기가 주도하는 포크 음반이다. 반면 1973년 2집 음반 [오세은의 노래모음(행복한 마음/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은 5인조 그룹 편성의 블루지한 록 감각을 탑재한 앨범이다. 이러한 포크적(어쿠스틱한) 면모와 그룹사운드적(일렉트릭한) 면모는 1974년 3집 [고아]에서 보다 잘 조화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그의 몇 장의 LP 앨범들이 컬렉팅 아이템으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음반이 희귀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다시 빛을 보게 되는 4집 앨범 [노래하는 나그네/친구에게]는 오세은의 디스코그래피 중 또 한번의 변모상을 보여주는 음반이다. 사실 3집 이후 오세은의 음악적 항로에는 몇 년의 시간들이 비어있다. 하지만 그 공백기들은 검열에 대한 도피의 시간도, 무채색의 시간도 아닌, 모색과 전환의 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1976년경부터 79년까지 설악산으로 국악 수학의 세월을 보냈는데(김중섭 등에게 사사받음), 이때 그는 산조를 비롯해, 판소리, 시조 및 악기 등을 연마했다. 손수 기획/제작하고 ‘한국음반’에서 발매한 이 음반의 중요한 지점은 여기서부터다. 그가 예전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진 화두들이 이 음반을 통해 투영되기 시작했음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이 앨범의 기조를 간단히 요약한다면 바로 음악적 ‘뿌리’를 찾으려는 오세은적인 시도라 할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원류를 찾는 것은 한국전통음악(국악)에서, 서양 대중음악의 원류를 찾는 것은 블루그래스(혹은 미국 루츠음악)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다시 말해 시조, 판소리 등의 영향을 받은 듯한 질박한 창법에 의한 음 이동, 5음계 위주의 선율 운용 등이 한국전통음악의 모습을 닮아 있지만, 단순하게 ‘국악가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음반은 아니다. 이는 포크나 컨트리, 블루스, 특히 그의 끊임없는 관심사였던 블루그래스를 이 앨범을 통해 본격적으로 호명한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사실 그의 블루그래스에 대한 애정은 포크음악으로 솔로 활동을 하던 1970년대 초반 진작부터 품었던 것이다. 김홍철(요들송으로 유명해진)과의 조우로부터 시작된 그의 블루그래스에 대한 열망은 기타교본 저술 작업(1983) 등지로도 이어진 바 있다.
이 앨범에는 손학래(리리콘), 박훈(베이스), 김명곤(오르간, 스트링 앙상블, 앨토 색서폰), 배수연(드럼, 퍼커션) 같은 베테랑 세션맨의 도움을 받았다. 손학래의 클래식적인 멜로디 감각을, 김명곤의 비트 감각을 빌어왔다. 손학래에 의해 리리콘이라는 낯선 악기가 도입되기도 했는데, 이는 일렉트릭 관악 신서사이저로, 앨범 뒷면 커버에 기록된 Lyrecon은 Lyricon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이밖에 박훈은 세광 출판사에서 기타관련 책을 많이 냈던 베이스 연주자이며, 곡 속에 양념처럼 얹히곤 하는 배킹 보컬 담당 이름 중 이세리는 오세은의 딸 이름이다.
타이틀곡 “노래하는 나그네”는 변칙 튜닝한 기타를 포함한 두 대의 기타가 3핑거 주법 등을 통해 아기자기한 풍미를 전해주며, 투박하고 소박한 보컬과 함께 앨범의 색깔을 예시해 준다. 이 앨범의 히트곡 “여행”도 마찬가지. 컨트리 혹은 블루그래스의 느낌이 살아 있는 이곡은 ‘서던 록 스타일로 만들고자 했다’는 그의 의도가 살아있다. “님을 믿는 마음”이 색서폰 연주를 입힌 컨트리 록 스타일이라면 “지나온 시절”은 셔플부기리듬이 실린 진한 블루스이다. 이 앨범에는 또한 레게 스타일도 삽입했는데 이 음반에서 경쾌한 “아가씨야”가 그런 곡이다(퍼커션은 배수연의 솜씨다). 물론 “친구에게”처럼 기왕의 포크적 분위기를 한껏 발산하는 곡도 포함되어 있다. 한편 텔레만(G. P. Telemann)의 소나타에 곡을 붙인, 클래시컬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나의 노래”라는 이색적인 곡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곡에서 관악기 느낌의 사운드가 바로 리리콘에 의한 것이다. 약간 우울한(사이키델릭한?) 풍취를 입힌 곡은 “회색 바다”로, 느린 오르간의 프롤로그와 기타 선율이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가사면에서도 그의 이정표가 잘 드러난다. 공수래공수거 인생사에 대한 가사(“님을 믿는 마음”)나 나그네 같은 소재(“노래하는 나그네”)에서 보여지는 구도(求道)와 명상의 내용이나, 한 폭의 시화 같은 소리풍경(“회색바다” 등)이 한국전통음악적 혹은 컨트리/블루그래스적 음악 컨셉트와 조응한다. 얼굴 모양의 추상화 앨범 커버 역시 마찬가지.
또 한 가지, 클래식 기타부터 일렉트릭 기타까지 (한 곡 내에서도)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기타 사운드를 들려주는 오세은의 연주 역시 주목할 만하다. “나의 노래”에서의 클래식 기타부터 “당신과 함께”에서의 하드 로킹한 기타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는 청명한 클린톤 기타와 예의 컨트리/블루그래스적 터치의 세컨드 기타가, “지나온 시절”에서는 블루지한 기타 솔로와 플렌저 이펙트의 몽환적인 기타가 융합되어 있다.
이처럼 이 앨범에서는 한국전통음악을 직접적으로 호출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고 끈끈한 ‘한국 음악’과의 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포크풍 “친구에게”는 3박자 구조나 목소리 결을 통해 민요적 무드를 들려주고, 하드 록 느낌이 살아있는 거친 기타의 “당신과 함께”나 “금의환향”은 리듬이나 선율 혹은 창법의 운용면에서 국악적 분위기를 암암리에 포섭시키는 감각을 보여준다. 이로써 오세은을 한국적 블루그래스의 완성자이자 한국전통음악의 적용자라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앨범이 바로 그 증거물이다. 김수철 혹은 신중현의 음악에 붙이곤 했던 한국적 음악, 또는 기타 산조의 장인이라는 수식어는 오세은에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출처 : 리버맨뮤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