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가창자가 선사하는 중독적 일렉트로닉
박기영 / Magictronica
집에서 책을 볼 때는 보통 라디오를 틀어 놓는다. 클래식 FM이 완전한 BGM의 기능을 한다면, 조금은 오래된 팝과 가요 중심의 선곡이 이루어지는 CBS 음악 FM을 듣다 보면 가끔씩 자연스럽게 옛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밤 시간에는 20~30년 전의 음악이 많이 흐르는데, 그 채널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박기영이다. 〈마지막 사랑〉과 〈시작〉 등 1999년 발표된 두 번째 앨범에서 사랑받았던 곡들, 3집의 〈Blue Sky〉(2000), 4집의 〈산책〉(2001), 5집의 〈나비〉(2004)와 영화 「국가대표」(2009)의 주제가로 사용된 러브홀릭스의 〈Butterfly〉 등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온전히 노래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새삼 감탄한다. 가창만으로 곡에 몰입하게 만드는 가수는 많지 않다. 그녀의 음악은 곡의 매력은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와 노래의 힘으로 듣는 이를 사로잡는 힘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그녀가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 노래했던 〈Nella Fantasia〉를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부담 없이 매끈하게 쭉 뻗어 나가는 목소리, 아름다운 음색과 표현력, 흠 잡을 데 없는 무대 매너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 퍼포먼스를 보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2,800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박기영은 대단한 아티스트다. 안정적인 중저음부터 거침없고 파워풀한 고음을 종횡무진 누비는 넓은 음역대와 정확하고 꼼꼼한 음정 컨트롤 등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가창력과 맑고 깨끗한 음색을 지닌 가수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뮤지션으로서 항상 열려 있는 유연한 태도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그녀의 범상치 않은 재능에 특별함을 부여해 준다. 이미 ‘노래 잘하는 가수’를 뛰어넘어 있는 그녀는 대중 친화적 팝이나 발라드, 록에 머무르지 않고 늘 주저 없이 새로운 시도를 담은 음악을 내놓는다. 각기 다른 곡의 분위기와 스타일에 따라 다채롭게 변화하는 창법과 음색은 그녀의 음악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이는 빠르게 변화해 온 대중음악의 트렌드와 제작・마케팅・소비 방식 속에서 그녀가 지닌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박기영은 10여 년 전부터 ‘대중의 취향’을 고민하는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에 집중했다. 상업적 결과를 먼저 가정하지는 않는다. 노래하는 사람으로서, 음악 방향을 정하고 곡을 쓰고 프로듀스하는 사람으로서, 또 만들어 낸 모든 결과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제작자로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과 경험치와 노력을 쏟아부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음악이 만들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래식 크로스오버(팝페라)를 비롯해 재즈, 포크, 블루스, 소울 등 여러 장르가 그녀의 음악에 쌓여 갔다. 거기엔 일렉트로닉 음악도 포함된다.
박기영의 음악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등장한 때는 2010년이다. 일곱 번째 정규 앨범 《Woman Being》에 수록된 〈빛〉과 〈This Love〉, 〈Flash Dance〉 등에 담긴 일렉트로팝의 향취는 신비로움을 머금은 몽환적인 작품 〈달〉에서 활짝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룹 W(더블유 앤 웨일)의 키보디스트 한재원이 편곡한 매혹적인 곡 〈달〉은 지금까지도 내 애청곡 플레이리스트에 자리하고 있다. 이후 싱글 중심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온 그녀는 2018년 10월 공개된 싱글 〈High Hits〉를 시작으로 2년 여 동안 일렉트로닉 성향의 음악을 발표했다. 다만 박기영의 일렉트로닉은 우리에게 친숙한 클럽 댄스 음악(EDM)이나 테크노, 하우스, 앰비언트 등 신시사이저 중심의 본격적 일렉트로닉 음악이라기보다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통해 전자 음악의 요소를 적극 활용하여 IDM, 글리치, 다운템포 등 여러 스타일의 색채를 녹인 일렉트로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음악 스타일의 특성상 가창보다는 사운드의 표출과 소리에 담긴 질감에 중점을 둔 편곡과 믹싱, 프로듀싱의 중요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탁월한 가창 역량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펑크 밴드 노 브레인의 기타리스트 정민준(Vovo)과 슈가 도넛의 기타리스트 애쉬가 편곡에 참여했던 〈High Hits〉 이후 박기영과 음악적 파트너십을 이루어 작업을 해 온 이는 밴드 힙포켓의 베이시스트였던 백중현(Brandon Paik)이다. 이들은 2018년 10월에 발표된 8번째 앨범 《Re:Play》에 수록되었던 〈I Gave You〉를 시작으로 2021년 4월 발표된 〈I’m Not O.K.〉까지 일렉트로닉 성향의 8곡을 함께 작업했다.
이 앨범 《Magictronica》는 박기영이 백중현과 함께 완성한 곡들을 중심으로 《Re:Play》에 담긴 〈Rain Rain Rain (Remix)〉과 〈High Hits〉를 포함해 10곡의 일렉트로닉 음악을 수록한 모음집이다. 박기영의 일렉트로닉 컴필레이션이라 할 수 있지만, 단순히 기존 발표곡들을 그러모은 편집 앨범과는 성격이 다르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4년 반에 이르는 세월이 흐른 후 각각의 곡을 다시 들으며 박기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 부족한 느낌의 핵심은 결국 ‘공간감’이었다. 그녀는 모든 곡들의 믹스 작업을 다시 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이를테면 ‘스테레오로 구현하는 돌비 애트모스 효과’였다. 각각의 소리 하나하나를 다시 늘어놓은 후 균형을 잡고 위상 조절을 통해 보다 풍성하고 깊이 있는 음장감과 입체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새로운 리믹스의 목표였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원했던 사운드스케이프는 엔지니어이자 프로듀서인 백중현의 손길로 완벽하게 재탄생했다. 박기영은 “사운드에 있어 하고 싶은 모든 걸 다 했던 작업”이었다고 얘기한다. LP 제작을 위한 마스터링은 두 차례 그래미를 수상했던 엔지니어 황병준이 맡아서 아날로그 음반에 최적화한 사운드를 담아냈다.
백중현의 말을 들어 보자. “이 앨범은 아티스트 박기영의 또 다른 색깔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즉 내면의 우울함을 격정적으로 풀어냄으로써 그에 따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마치 아주 강한 와인의 맛 같은 음악들로 구성되어 있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스타일이 일렉트로닉 기반의 하이브리드 장르입니다. 2018년부터 시작된 박기영만의 일렉트로닉 음악을 앨범을 위해 재정비하여 좀 더 정확하게 구현했습니다. 타이틀곡인 〈Tough Girl (Remix)〉의 경우 2020년 공개되었던 〈Tough Girl〉을 로파이 스타일의 록 사운드와 트랩 비트를 믹스하여, 여자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화나게 하는 남자를 마치 채찍으로 후려치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했어요. 이런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레전드 힙합 듀오 가리온의 래퍼 MC 메타를 참여시켜 랩을 더했습니다. 또한 박기영의 기존 음악 스타일에 없는, EDM의 빌드업(build up)과 드롭(drop) 구성을 과감하게 사용했죠. 중간에 나오는 브릿지 파트에서는 박기영 고유의 가창력을 확연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곡 외에도 ‘가수’ 박기영의 대단한 가창력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나른하고 몽환적인 〈Rain Rain Rain (Remix)〉이나 깨질 듯 여린 감성을 표출하는 〈고백 후〉, 특유의 서정적인 피아노 발라드로 전개되는 〈자꾸 이러지 마〉, 시원스럽게 내지르는 가창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I’m Not O.K.〉나 가슴을 때리는 듯한 비트에 실려 파워풀한 중저음과 고음을 오가는 목소리에 넋을 잃게 되는 〈High Hits〉, 그리고 그녀의 끈적한 블루스 〈I Gave You〉 같은 곡들에 더 귀를 기울여 보라. 탄탄히 구축된 섬세한 소리에 어우러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넓고 깊은 공간감을 이루며 뚜렷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동시에 더없이 기분 좋은 중독을 전해 준다.
2023년은 박기영이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 지 25년이 되는 해다. (데뷔 앨범 《One》의 크레디트를 보면 제작일이 1997년 11월로 표기되어 있지만 음반 생산 시점과 출시 시점에는 차이가 있다. 박기영의 1집이 시중에 발매되고 그녀가 방송 출연 등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보인 시기는 1998년 3월이다.) 이를 기념해 그녀가 준비한 여러 프로젝트의 시작이 바로 《Magictronica》다. 그리고 자신의 대표곡을 새로 녹음한 베스트 앨범 《Love You More》와 크로스오버 앨범이 기다리고 있다. 일상에서 그녀에게 강렬한 에너지를 주고 살아갈 근원적 힘이 되는 건 음악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러도 이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25년을 노래하고 음악을 만들었지만 앞으로의 모습이 더 기대되는 아티스트, 박기영의 현재가 여기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매혹적이고 세련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글/김경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