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을 돌아 만난 지금 여기 우리.
김석준과 조동익, 그리고 조동익과 김석준. 참 오랜 인연이다. 둘은 1993년 처음 만났을 것이다. 김석준은 제5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참가자였고, 조동익은 심사위원이었다. 장소는 지금은 이름이 바뀐 계몽아트홀, 행사의 진행은 김광석이 맡았다고 하니 참으로 아득한 시간이다. 김석준은 5회 대회에서 ‘사진 태우기’란 노래로 금상을 수상했다.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정수월), 작곡가 이승환(스토리), 이규호, 조윤석(루시드 폴), 그리고 이한철과 윤영배가 같은 해 대회에 참가했다는 건 이후의 이야깃거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상을 받은 허성안과 지영수, 금상을 받은 김석준의 이름이 가장 덜 알려졌다.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석준은 고향 광주로 내려가 회사원의 삶을 살았다. 직장인의 일상에서도 노래는 존재했다. 그렇게 만든 노래는 1999년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New Face」를 통해 공개됐다. 말 그대로 새로운 얼굴들이 참여한 앨범이다. 이 ‘새로움’을 한데 모은 건 프로듀서 조동익이었다. 김석준과 조동익은 6년 만에 다시 음악을 매개로 만났다.
조동익은 1984년 나온 「우리 노래 전시회」를 통해 처음 자신(어떤날)의 음악을 알릴 수 있었다. 훗날 조동익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 노래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굉장한 힘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음악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며 앨범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곤 “나도 그들(후배들)에게 그러한 도움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New Face」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984년 이제 막 경력을 시작했던 조동익은 1999년 선배가 되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후배들에게 기회와 경험을 주고 싶었다.
「New Face」는 「우리 노래 전시회」만큼의 반향은 얻지 못했다. 기묘한 세기말의 분위기와 그 안의 진솔한 노래들은 어울리지 못했고, 시대도 변해 있었다. 하지만 노래는 남았다. 모두 여덟 명의 노래, 김석준의 노래는 그 사이에서도 빛났다. 수줍고 어눌하게 들리는 노래는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김석준은 두 곡의 노래를 남긴 채 다시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어쩌면 앨범과 노래에 대한 미미한 반응 때문이었을 수 있고, 음악이 책임질 수 없는 생활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일상의 한가운데서 계속해서 노래를 만들었다.
상을 받은 지 27년, 「New Face」 이후 21년 만인 2020년 첫 정규 앨범을 낼 수 있었던 건 그가 계속 일상에서 노래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노래들은 다시 조동익과 이어졌다. 2022년 발표한 앨범 「30」에 조동익의 이름이 보였다. 그는 여러 곡의 편곡과 연주를 돕고 믹싱과 마스터링까지 책임졌다. 김석준처럼 조동익 또한 오랜 공백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그렇게 김석준과 조동익은 먼 길을 돌아 다시 만났다.
「하루 종일」은 조동익이 모든 노래의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드문 음반이다. 1990년대 그는 김광석과 안치환의 명작을 만들어 낸 프로듀서였지만, 꽤 오랜 공백 뒤에 복귀한 뒤에는 동반자 장필순과 제주살이를 함께 했던 윤영배의 음반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혼자서 모든 음악을 책임진 적이 없다. 이는 비슷한 경험을 한 김석준에 대한 이해일 수도, 「New Face」의 상업적 실패에 따른 부채 의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부수적인 걸 떠나 김석준이 가진 음악적 재능에 대한 인정일 수도 있다.
음반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동익만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끔 건반 연주를 도와주던 박용준마저도 없다. 조동익은 건반과 프로그래밍이라는 최소한의 도구를 사용해 때론 미니멀하게, 때론 몽환적으로 사운드를 연출한다. 이렇게 만든 소리를 갖고 ‘무지개 녹음실’이라 이름 붙인 자신의 공간에서 하염없이 다듬고 세공한다. 누군가에겐 그저 유려히 흘러갈 뿐이겠지만, 귀 기울여 들을 때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이 세밀한 소리는 이 사운드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를 자연스레 상상하게 한다.
이 사운드 안에 자리한 건 여전히 소박하지만 단단한 김석준의 곡이다. ‘사진 태우기’와 ‘하루 종일’에 담겨있는 일관된 정서는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낮고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다. 「하루 종일」이 김석준의 다른 음반과 다른 건, 또 그만큼 달리 들리는 건 김석준의 목소리가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가진 매력을 모른 채 노래하기를 두려워하는 그에게 직접 노래를 부르라는 조동익의 강권이 있었다. 김석준은 다섯 곡 가운데 세 곡을 직접 불렀고, 그 노래들은 소박함이 줄 수 있는 감동의 다른 말처럼 들린다.
여전히 자신감이 없고 수줍어하는 그의 곁에서 하나음악 시절의 오랜 동지인 장필순과 이규호, 차은주가 목소리를 보탰다. 앨범의 타이틀곡이 된 ‘하루 종일’은 장필순이 다시 불렀다. 아무런 치장 없이 그저 담담하게 장필순은 노래한다. 김석준의 음악이 갖고 있는 매력을 장필순과 조동익 두 거장은 ‘하루 종일’을 통해 다시 알려준다. 이규호는 ‘오늘의 날씨’에서 코러스로 참여했지만 고유의 목소리로 코러스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김석준의 세련된 팝적 감각은 차은주가 부른 ‘이제 그만’에 잘 담겨 있다.
음반의 마지막 곡은 ‘구파발’이다. 「New Face」에 ‘하루 종일’과 함께 김석준이 만들고 불렀던 노래다. 김석준과 조동익의 오랜 인연과 함께 그때와 현재를 이어주는 곡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 곡의 디렉터로 조동진, 조동익, 윤영배라는 이름이 있고, 연주와 편곡을 함께 한 박용준, 김영석이 있다. 양영숙과 김용수가 코러스로 참여했고, 윤정오와 서종칠, 이종학이 소리를 만졌다. 단지 이 이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한 시절을 지나온 것만 같다. 그때의 소리와 추억, 시간의 흐름을 모두 담아 조동익이 새롭게 마스터링하고 음반의 마지막 곡으로 담았다. 그 음반의 제목은 김석준의 「하루 종일」이다. -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