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도 눈은 내린다. 눈 내린 숲과 자연의 풍경도 아름답지만 고층 빌딩 사이로 내리는 눈도 그만의 운치가 있다. 김현철이 더 많이 봐온 눈의 풍경은 “회색빛 빛깔에 잠긴” 도시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김현철은 눈으로 덮인 회색의 도시 풍경을 보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십대 시절부터 눈의 노래를 만들어오던 감수성은 오십대가 된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겨울아 내려라>는 지난 여름을 앞두고 발표했던 <투둑투둑>을 잇는 연작이다. 김현철은 늘 여름과 겨울, 비와 눈, 새벽과 아침을 소재로 곡을 쓰고 노래해 왔다. 계절과 기상과 시간의 변화를 깊게 들여다보는 타고난 감수성 덕분이었다. 이 소재들은 일상의 다른 말이기도 했다. 김현철은 범사(凡事)로 노래를 만드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저 머릿결을 스쳐 가는 바람을 맞는 그 기분을 노래로 묘사할 줄 알았고, 늘 걷던 동네를 특별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일상을 살며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와 눈을 가지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 수 있던 것도 이 감수성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거리는 잿빛에 가까웠고, 그 잿빛 거리에 내리는 눈과 비는 이내 음악의 영감이 됐다. 그가 잿빛, 혹은 회색빛으로 바라봤던 그 거리와 도시는 이내 도회적인 감수성으로 바뀌어 도시를 상징하는 음악이 되었다. 이른바 ‘시티팝 리바이벌’ 시대에 그의 음악이 다시 젊은 세대에게 소환된 이유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십대에서 오십대가 된 그는 여전히 눈을 보며 영감을 얻고 곡을 쓴다. 대신에 “고운 목소리로 사랑하는 님을 부르듯” 온다던 눈은 이제 자신의 과거를 덮어줬으면 하는 소재가 되었다. ‘김현철’과 ‘눈’을 함께 연상할 때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눈이 오는 날이면’과 ‘춘천 가는 기차’를 통해 보여줬던 서정과 낭만, 혹은 ‘눈싸움하던 아이들’에서 연상되는 눈 오는 날의 설렘 같은 감정이다. 하지만 김현철은 <겨울아 내려라>의 첫 곡이자 표제곡 ‘겨울아 내려라’에서 내리는 ‘겨울’이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덮어주길 바란다. 내리는 눈을 보며 그저 설레고 감상에 빠지던 소년은 회고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것이다.
<겨울아 내려라>는 그런 어른의 겨울음악이다. 낭만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음악은 회고의 정서가 더 강하다. 차분한 발라드 형식으로 ‘겨울아 내려라’를 부른 그는 또 다른 신곡 ‘외출’에서 완벽한 ‘어른의 보사노바’를 완성했다. ‘춘천 가는 기차’와 ‘외출’은 보사노바와 눈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품고 있지만 감성은 사뭇 다르다. 시간이 흘렀고, 김현철은 이를 연륜이란 말이 어울리게 어른의 방식으로 겨울과 보사노바를 표현했다. 그가 오랜 시간 좋아하고 천착해온 AOR 음악이 ‘성인 지향’(Adult-Oriented)이란 뜻인 걸 생각한다면 신곡들은 그 의미에 정확히 부합한다.
<투둑투둑>처럼 <겨울아 내려라>에서도 김현철은 과거 자신의 음악을 새롭게 해석한다. 1집에서 그 어떤 노래보다 낭만적으로 겨울의 풍경을 묘사했던 ‘눈이 오는 날이면’을 새로운 편곡, 새로운 연주자와 함께 녹음했다. 또 3집의 시작을 알렸던 명(연주)곡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을 새로운 연주로 꾸미며 또 한 번 ‘겨울 저녁’의 이미지를 더 깊게 만들었다. 듣는 이들은 그 감성에 더 깊게 젖을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 김현철과 호흡을 맞춰온 연주자들은 기존에 갖고 있던 연주의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좀 더 느긋한 호흡을 들려준다. 가령 ‘눈이 오는 날이면’에서 과거 조동익이 들려줬던 도드라지던 베이스기타 소리는 이제 이태윤의 손을 통해 재현된다. 기본은 가져가면서도 음반의 전체 기조에 맞게 더 여유로워지고 느긋해진 어른의 정서가 연주를 통해서도 구현된다.
시티팝의 재유행과 함께 재소환된 김현철은 지금 그 어떤 음악인보다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규 앨범만 두 장을 발표했고, <포크송 대백과> 프로젝트, 또 <Brush>와 <투둑투둑>. <겨울아 내려라> 등 일련의 음악을 작업했다. 스튜디오 작업뿐만이 아니다. 팬들과 계속해서 호흡하며 꾸준하게 무대에 서왔고, 이번에도 1월 18일~20일, 사흘간 서울시 중구 CKL 스테이지에서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다. 다작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도회적인 팝 음악을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매번 주제를 달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보이지만, 그의 음악에 늘 ‘도시’와 ‘팝’의 감성이 담겨 있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겨울아 내려라>에는 더 성숙해진 어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도시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고, 좋은 어른의 음악을 듣는 건 분명 흐뭇한 일이다. 차분한 겨울의 음악을 들을 시간이다. (김학선/대중음악평론가)
김현철 12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