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 데뷔 25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마지막 앨범
The Classic
Prologue
박기영의 데뷔 25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마지막 앨범이 도착했다. 2023년 여름 선보인 일렉트로닉 앨범 《Magictronica》를 시작으로, 가을 발매된 베스트 앨범 《Love You More》 이후 약 1년 만에 마지막 페이지인 크로스오버 앨범 《The Classic》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박기영은 2012년 tvN의 경연 프로그램 「오페라 스타」의 출연을 통해 가수로서의 전환점을 맞이한 바 있다. 오페라라는 ‘이종’의 분야에서 보여 준 폭발적인 가창력, 낯선 곡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력 그리고 우승이라는 평가의 결과물을 통해 대중가수 박기영은 새로운 영역에 도달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체급을 옮겨 다니며 챔피언 벨트를 챙기는 일급의 프로 복서처럼, 그녀는 경계를 넘나들며 마침내 프리 패스를 획득한 노래의 자유인이 된 것이다. 데뷔 25주년 기념 프로젝트의 마지막 앨범으로서 대중에게 공개되는 이 앨범은 그녀가 그 다양한 영역을 오가며 거두어들인 가장 최근의 수확물인 셈이다.
1. Nella Fantasia
크로스오버, 한정적 의미로는 흔히 ‘팝페라’라고 부르는 장르의 가장 대표적인 곡이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1986)에 흘렀던 〈Gabriel’s Oboe〉의 보컬 버전이다. 극중 수도사를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부족민들에게 진심을 전할 때 사용한 기악곡이다. 영화에 수록된 스코어는 영화 음악계의 전설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했다. 팝페라 가수인 사라 브라이트먼이 2년에 걸친 구애 끝에 보컬 녹음을 허락 받았고, 1998년 이탈리아의 작사가 키아라 페라우가 쓴 가사를 붙여 발표했다. 앨범의 첫 곡으로 이 곡을 선택한 것에서부터 가수 박기영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음악가의 곡,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팝페라 아티스트 사라 브라이트먼의 대표곡을 택한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맑고 청아하게 시작되는 초입부터 기교보다는 정통의 창법으로 전체 곡을 이끄는 그녀의 패기는 데뷔 25주년의 마지막 앨범이 왜 크로스오버여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이브레이션 없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고음부와 명료하게 전달되는 가사까지, 그녀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곡을 소화해 낸다.
2. 위대한 꿈
영국의 작곡가 구스타브 홀스트의 관현악 모음곡 〈행성〉 중 〈목성, 환희를 부르는 자〉(1914)의 중심 멜로디에 박기영이 가사를 붙인 작품이다. 관현악곡 특유의 웅장함이 곡의 전반에 걸쳐 느껴진다. 영국인들의 조국 찬가인 〈I Vow To Thee, My Country〉의 메인 테마가 바로 이 곡에서 유래됐다. 딸아이에게 한국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직접 쓴 가사는 서정적이지만 비장하다. 곡이 지닌 정서와 정확히 조우하는 노랫말은 그녀가 곡뿐만 아니라 가사에 있어서도 탁월한 감각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힘주어 내뱉는 웅변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아이에게 속삭이듯, 여리지만 아름답게 전달하는 박기영의 감각은 엄마라는 그녀의 위치가 음악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알게 해 준다.
3. Caruso (feat. 유채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이탈리아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에게 헌정된 곡이다. 칸초네 가수 루치오 달라가 1986년에 곡을 썼고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노래로 알려졌다. 병을 앓으며 죽어 가는 한 남자(엔리코 카루소)를 생각하며, 그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호텔방에서 루치오 달라가 거의 즉석으로 작곡했다는 이 곡은 그 사연만으로도 많은 이들을 울게 한다. 앨범의 녹음에는 JTBC 「팬텀 싱어」의 우승팀 라포엠의 멤버인 유채훈이 듀엣으로 참여했다. 톤과 스타일을 바꿔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유채훈의 보컬에 화답하듯, 박기영은 노련한 배우의 대사처럼 곡을 소화한다. 호흡마저도 곡의 일부로 끌고 와 마치 오페라나 뮤지컬의 듀엣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그녀의 기교는 절정에 이르러, 단순한 음악이 아닌 노래하는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 준다.
4.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마이클 윌리엄 발프의 오페라 「보헤미안 걸」(1843)에 수록된 아리아 곡이다. 재즈 뮤지션 글렌 밀러는 이 곡에서 영감을 받아 1941년 스윙 곡인 〈I Dreamt I Dwelt In Harlem〉을 작곡하기도 했고, 영화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영화 「순수의 시대」(1993)에 아일랜드 가수인 엔야가 노래한 이 곡을 삽입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음악팬들은 엔야의 바로 이 몽환적인 버전으로 기억할 것이다. 엔야는 이 곡을 자신의 앨범 《Shephed Moons》(1991)에 수록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녀에 비해 박기영은 좀 더 맑고 가볍게 곡을 해석한다. 미드 템포의 곡이지만 음 하나하나를 정확히 발음하는 탓에 경쾌한 리듬감이 느껴진다. 음악을 듣는 동안 대리석 궁전의 이곳저곳을 거니는 소녀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온전히 그녀가 펼쳐 보이는 뛰어난 곡의 소화력에 빚지고 있다.
5. Casta Diva
빈센초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1831) 제1막에 등장하는 아리아다. 벨리니의 오페라는 19세기에 거의 잊혀졌다가 20세기에 마리아 칼라스가 노르마 역을 맡으면서 다시 부활했다. ‘정결한 여신’이라는 제목처럼 여제사장인 노르마가 신에게 갈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곡이다. 곡 자체가 신에게 드리는 기도의 형식이기에 아리아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하지만 박기영은 곡의 분위기를 좀 더 낭만적이고 경쾌하게 이끌어 간다. 이미 사랑의 향기에 듬뿍 취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는 때로는 퇴폐적으로 들릴 만큼 유혹적이다. 노래의 후반부 사랑하는 이에게 “내게 돌아와 줘요”라고 노래하는 부분은 누구라도 그 회유에 넘어갈 만큼 진한 호소력을 머금고 있다. ‘위대한’ 마리아 칼라스가 놓친 그 어떤 부분을 박기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창조해 내고 있는 것이다.
6. O Mio Babbino Caro
조바키노 포르차노가 대분을 쓰고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잔니 스키키」(1918)의 아리아 곡으로, 191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초연 당시 소프라노 플로렌스 이스턴이 최초로 노래했다. 오페라보다 더 큰 인기를 끈 〈O Mio Babbino Caro(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이후 수많은 소프라노들이 불렀으며, 특히 1969년 호주의 소프라노 조안 해먼드가 녹음한 레코드는 100만 장 판매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기도 했다. 오페라 아리아계의 메가 히트곡인 셈이다. 곡의 가사는 여주인공 라우레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당신이 싫어하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나치게 서정적이어서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곡을 박기영은 마디마다 변화를 주며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차분히 힘을 모으다 흑백의 명암처럼 선명히 부각되는 고음의 하이라이트는 충분히 인상적이다. 2분 30초 가량의 짧은 구조 안에서 기승전결의 완결성을 보여 주는 그녀의 보컬은 놀라움 그 자체다.
7. Habanera (Feat. 유성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1875)의 유명한 아리아다. 카르멘이 등장해 군인 돈 호세를 유혹하는 장면에 사용되었다. ‘사랑은 길들지 않은 새’라는 가사처럼 자유로운 영혼인 카르멘을 상징하는 곡이기도 하다. 쿠바의 무곡 아바네라 형식을 도입해 작곡된 곡으로 알려져 있다. 변덕쟁이인 팜 파탈 카르멘을 박기영은 다소 애교 넘치면서도 우아한 이미지로 그려 낸다. 오페라의 수록곡이기에 대사와 노래를 오가는 번거로움이 오히려 그녀의 생동감 넘치는 톤을 통해 생명력을 부여한다. 프랑스어 가사 역시 리듬을 더하며, 듀엣으로 참여하고 있는 유성녀와의 분담을 통해 극적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마치 나뭇가지 이곳저곳을 종종걸음과 날갯짓으로 옮겨 다니는 명랑한 새처럼, 박기영은 그렇게 노래하고 있다.
8. 동백 아가씨
1964년에 발표된 곡으로 우리 가요 역사상 가장 성공한 히트곡 중 하나로, 동명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동백 아가씨」의 주제가이다. 남녀 주인공은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맡았다. 작사는 한산도, 작곡은 백영호, 그리고 노래는 이미자가 했다. 당시 신인이었던 이미자는 이 곡 하나만으로 국민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1965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고, 1987년 해금 되었다. 〈동백 아가씨〉는 1960년대는 물론 이후에도 우리 대중가요가 거둔 가장 큰 성취의 하나로 거론된다. 트로트의 창법과 정서는 일반적이지 않기에 나름의 장벽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한(恨)의 정서에서 기원한다는 내적인 뉘앙스는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다. 박기영은 바로 그 부분을 정확히 잡아내 자신의 노래에 녹여 낸다. 여리지만 거친 톤으로 자신의 보컬 스타일을 바꾸고, 감정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조금은 투박한 발성을 고의적으로 삽입해 앞선 곡들과는 완전히 다른 곡 해석을 들려준다. 슬프지만 눈물 보이지 않는다는 문구처럼, 감정을 조절해 과도한 몰입을 경계하는 그녀의 냉정히 계산된 음성은 무서우리만큼 가슴속 깊이 파고든다.
9. 툭 내리던 오후
최인환이 가사를 쓰고 김시민이 작곡한 작품으로, 앨범에서 유일한 오리지널 창작곡이다. 윱 반 라인의 플뤼겔호른 소리와 조윤성의 피아노, 그리고 스트링 세션이 아름답게 매칭된 곡이다. 물론 박기영의 보컬도 나무랄 데 없다. 원곡의 중압감에서 벗어난 그녀의 보컬은 앞의 곡들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원곡의 데자뷔를 떠올릴 필요 없이 무심히 앉아 편하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노래의 제목과도 꽤 어울리는 감상법이다. 독특한 곡이다. 매 순간이 절정인 것처럼 구절마다 균형감 있게 배치된 감정선은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청자를 묶어 놓는다. 멍하니 어느 순간에 잡혀 있다 보면 노래는 끝나고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멋진 동시에 위험한 곡이다. 마치 돛대에 묶인 오디세우스처럼 세이렌의 목소리를 무한히 반복해 들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0. Pie Jesu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 Op. 48〉(1888) 중 한 곡이다. ‘자비로운 예수여, 그들에게 평안을 주소서’라는 의미를 지니는 이 곡은 라틴어 레퀴엠 미사에서 발췌한 부분으로, 종교적 의미와 함께 유한한 삶과 그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다른 작곡가들의 레퀴엠이 죽음의 공포와 심판의 두려움을 중심에 배치한 것에 비해 포레는 죽음 이후의 평온과 안식을 중심에 두고 곡들을 만들었다. 박기영이 10곡으로 구성된 크로스오버 앨범 《The Classic》의 마지막 곡으로 이 곡을 선택한 것은 아마도 자신의 앨범이 단순한 노래의 나열이 아닌, 무언가 더 의미 있는 것이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음악이란 단순히 지나치는 거리의 간판 같은 것이겠지만, 그녀에겐 수백 년의 고난을 통해 쌓아 올린 대성당의 십자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하려 하는 박기영의 성스럽기까지한 진심이 이 곡에 담겨 있다.
Epilogue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경계에 갇힌다. 가수는 대중가요를 불러야 하고, 판소리 명창은 판소리를 해야 한다는 식의 편견과 강요가 그 경계선 위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누군가가 하라고 하는 일의 충돌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박기영이 자신의 데뷔 25주년을 기념하여 완성한 3장의 앨범은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지금껏 그녀가 살아온 역사를 기록한 베스트 앨범과 편견의 경계를 넘고자 한 일렉트로닉, 그리고 크로스오버 앨범.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기록과 관록이 녹아든 석 장의 음반은 그래서 가수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선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변화하듯이 우리도 변화해야만 하며, 그것은 어쩌면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할 원초적인 욕망이라는 사실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했고, 이를 통해 결국은 장르의 한계를 허물어 마침내 음악 안에서 자유로워진 한 가수의 앨범이 그렇게 이제 막 도착했다.
글 / 김태훈 (팝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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