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에 있어 20세기는 확실히 록 음악의 시대였다. 몇 차례의 사망 선고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리듬과 거친 노이즈를 앞세운 이 매력적인 음악은 수없이 많은 스타일의 변종을 양산하며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어느새 21세기, 여전히 록 음악은 정상의 자리를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그 해답은 아마도 일렉트로니카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90년대를 넘어서면서 록 음악의 경향은 일렉트로니카와의 교류가 대세를 이루어 왔다. 록 음악이 일렉트로니카에 흡수되는 형태이건, 아니면 록이 전자음을 부분 수용하는 형태이건, 그도 아니면 두 가지의 절충형이든 간에,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결합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모양새다. 그리고 이러한 영미 문화권의 부지런한 움직임을 바라보다 국내 음악계로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는 오래 전부터 그 거대한 흐름의 일원으로 준비해온 그룹 ‘비행선’을 발견하게 된다.
비행선은 전천후 뮤지션 우용욱을 중심으로 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에프톤 사운드(Ftone Sound)의 박현준과 여운진이 이 그룹의 객원 멤버라는 사실도 살짝 귀띔해둔다. 이들은 1997년에 결성되어 활동을 시작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음반을 발표하지 못하다가 지난 2003년에 이르러서야 첫 음반 [Bihaengsun Vol.1]을 내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홍대앞 클럽을 근거지로 훵키한 록과 하우스, 덥, 트랜스 등이 어우러진 독특한 형태의 음악을 선보이며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특히 비행선의 1집은 리듬 파트에 있어서는 일렉트로니카의 경향을, 기타와 보컬 파트에 있어서는 록의 특질을 드러내며 이 두 대조적인 요소의 충돌 지점을 절묘하게 포착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에프톤 사운드 멤버들이 지닌 전자음악의 뛰어난 노하우나 까랑까랑한 톤으로 노래하는 김현주의 존재도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음반 곳곳에서 뚜렷한 존재감의 기타 연주를 들려준 우용욱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록과 일렉트로니카가 결합하는 음악적 조류를 국내에서 가장 민감하게 수용해낸 밴드라는 평가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지금 소개할 비행선의 2집 [아름다운 비행 Part 1]은 전작으로부터 꼭 1년 만에 팬들 앞에 선보이는 음반이다. 이들의 데뷔 음반이 결성 7년 만에 발표된 ‘때늦은’ 음반이었음을 감안한다면,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은 비행선의 한창 물오른 음악적 감각을 증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음반 제목에 덧붙여진 ‘Part 1’이라는 단서도 생각해볼 만하다. 다음 작업과 이번 2집의 연속성을 암시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2집 자체도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상대적으로 일렉트로닉 색채가 짙은 Part 1과 기타 사운드를 살려내는데 중점을 둔 Part 2의 두 부분, 도합 17트랙으로 꽉 들어찬 음반인 것이다. 비행선의 팬으로서 개성 넘치는 멤버들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수록곡들의 면모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음반에는 1집과 비교해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첫 트랙 “아름다운 비행”에서부터 변화가 감지된다. 이 곡은 반음계를 들고 나는 쉽지 않은 미묘한 음정을 특유의 까끌까끌한 촉감의 음색으로 포착하는 남상아(3호선 버터플라이의 보컬리스트)의 보컬로 음반의 시작을 인상적으로 장식해낸다. 특히 낭만적으로 울려 퍼지는 기타 아르페지오와 대조적으로 몽롱하게 떠도는 신서사이저 잔향은 데뷔 음반에서는 들려주지 않던 서정적인 면마저도 느끼게 한다. 남상아 뿐만 아니라 이 음반에는 도합 4명의 객원 보컬리스트가 참여해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1집 음반을 라이어트 걸(riot girl) 느낌의 도발로 장식하던 김현주가 개인 사정으로 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로 인해 2집에는 보컬이 담긴 트랙은 7곡(“푸른 새벽”의 세 가지 버전을 포함해서)으로 제한되었고, 나머지 곡들은 그루브감 넘치는 일렉트로닉 비트의 연주곡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보컬의 부재 외에도, 박현준-여운진이 복귀해 음반 전반적인 작업에 큰 비중을 차지한 것 또한 음반의 일렉트로니카 비중이 커지게 된 원인일 것이다.
강화된 일렉트로닉 색채는 두 번째 곡 “My”부터 7번째 트랙 “Gateway”로 잇달아 이어지는 댄서블한 비트의 향연으로 대표된다. 하우스, 트랜스, 애시드 하우스 등 테크노의 온갖 스타일이 망라되고 있다. 특히 묵직한 울림의 탐탐과 짜임새있는 프로그래밍 리듬이 우용욱 특유의 카랑카랑한 기타 솔로와 어우러지는 “My”, 밴드 99의 전 멤버인 김책의 폭발적인 드러밍이 훵키하게 간질대다 격렬하게 휘몰아치기를 번갈아하는 기타 연주와 호응하는 “Q”는 비행선 1집을 상기하게 하는 멋진 곡들이다. 여운진이 작곡한 “방울”, “괜찮아” 역시 전매특허인 매끈하고 청량감 넘치는 댄스 뮤직을 유감없이 들려주고 있다.
음반의 Part 1을 마무리하는 곡은 뜻밖에도 따스한 색채의 내향적인 포크 발라드 “푸른 새벽”이다. 음반에서 키보드와 엔지니어를 담당하며 맹활약한 최철규가 작곡하고 객원 보컬인 배정현이 노래한 이 곡은 음반을 통해 무려 세 가지 버전으로 선보이고 있는데, 만일 어쿠스틱 버전만 듣고 ‘비행선답지 않다’고 느꼈다면 오리지널 버전을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어쿠스틱 버전이 마치 동명의 포크 듀오의 음악처럼 풍부한 울림의 인간미 넘치는 사운드를 들려준다면, 12번째 트랙에 자리한 오리지널 버전은 전혀 다른 곡으로 느낄만큼 판이한 편곡으로 선보이고 있다. 소절마다 흩뿌리는 피아노의 아르페지오와 전형적인 4비트의 리듬이 상하축을 가득 채우며 풍성한 공간감을 형성하고, 여기에 사운드 이펙트가 가세해 레이저빔을 쏘아대며 곡이 내뿜는 신비로운 느낌을 거든다. 청아하고 자연스러운 톤으로 노래하는 배정현의 보컬 또한 뛰어난 부분 가운데 하나다. 세 개의 버전으로 나뉘어진 것을 볼 때 이 곡 “푸른 새벽”이 이 음반의 타이틀곡이자 ‘대중적’인 야심이 서린 곡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무튼 어쿠스틱 버전의 “푸른 새벽”에 이어지는 곡 “별”을 통해 Part 2가 시작된다. 역시 최철규의 작곡으로 앞의 곡과는 대조적으로 스트레이트한 록 넘버인 “별”은 객원 보컬 윤혜린의 깨끗한 보컬 톤이 단순하고 직선적인 곡의 느낌을 잘 살려내고 있다. 특히 돌개바람처럼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기타 솔로는 이어지는 음반의 두 번째 파트가 상대적으로 ‘록’을 강조하는 흐름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실제로 “방울”은 들썩대는 와와 기타가 그루브감을 배가하는 곡이고, 뒤이은 “무지개”는 버스(verse)에서 4비트로 전개하다 후렴에서 라이드 심벌을 연타하며 돌변하는 리듬의 전개가 흥미로운 곡으로 역시 기타 사운드가 흥미로운 곡이다. 특히 “무지개”에서는 훵키하게 넘실대는 기타와 절묘하게 리듬을 타는 윤혜린의 보컬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푸른 새벽”의 오리지널 버전을 지나면 Part 1에서 만났던 “My”와 “Q”, “Gateway”가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등장한다. 특히 “Q”와 “My”의 ‘another’ 버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곡 모두 Part 2에서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편곡되어 있는데, 독특하게 뒤틀린 비트와 켜켜이 덧입혀진 사운드 이펙트, 시종 그르렁대는 꼬슬꼬슬한 감촉의 기타 리프가 매력적이다. 특히 마지막 트랙에 자리한 “My”의 ‘rock version’은 전자음과 파워풀한 드러밍, 변화무쌍한 박현준-우용욱의 트윈 기타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1집에서 선보인 ‘록과 일렉트로니카의 유기적인 결합’의 가능성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사실 비행선 1집의 록+일렉트로니카 작업에 매료된 청자라면 상대적으로 일렉트로니카 쪽에 무게 중심을 둔 2집의 음악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행선이 애초 특정한 장르나 스타일을 지향하는 밴드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록+일렉트로닉이라는 틀 안에 이들의 음악을 제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한 리드 보컬의 부재로 인해 보컬이 담긴 곡을 만드는데도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는 부분 역시 생각해볼 부분이다. 이에 더해 이번 음반이 두 파트로 나뉘어진 ‘아름다운 비행’ 가운데 ‘Part 1’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이번 2집이 비행선이라는 그룹이 앞으로 펼쳐갈 음악적 항로에서 ‘일렉트로니카’라는 이름의 ‘경유지’라는 심증을 굳어지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댄서블한 테크노 음악을 구사하는 비행선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이다. 춤추는 비행선, 그들의 비행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자, 이제, 어디로 날아갈 것인가. 그들이 계속해서 펼쳐갈 ‘아름다운 비행’을 주목해 보도록 하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