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영원한 자유인, 한대수
그의 37년간의 음악 활동을 담은 연대기
[The Box]
한대수는 ‘행복의 나라’와 ‘물 좀 주소’로 대변되는 ‘추억의 가수’로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뮤지션이다. 그는 자기 반복을 일삼거나 히트곡 하나로 정체성이 설명되는 정형화된 가수 또는 뮤지션과는 거리가 먼, 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더없이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싱어 송 라이터이다. 11장의 디스코그래피에 포함되는 모든 앨범들에 담긴 서로 다른 고유한 색채와 향기, 그리고 ‘소리’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는 그의 치열했던 삶과 틀에 갇히지 않은 정신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의 음악은 분명 당대의 여느 포크 가수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표출해왔다. 강한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성기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목소리와, 깊은 은유와 통쾌한 직설법과 시적 상상으로 가득한 탁월한 노랫말, 기존 가요의 멜로디 전개 방식과는 사뭇 다른 곡 구성, 카주와 목탁, 톱 등 우리에게 생소한 악기 또는 악기가 아닌 소품들을 이용한 독특한 사운드 메이킹 등은 그의 작품들에 뚜렷한 정체성을 부여해준 요소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여러 작품들은, 데뷔작 [멀고 먼 길](74)의 서정성의 극치를 이루는 ‘바람과 나’와 ‘옥이의 슬픔’, 두 말이 필요 없는 히트곡들인 ‘행복의 나라’와 ‘하루아침’, ‘물 좀 주소’는 물론이거니와, [고무신](75)의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되는 ‘오면 오고’와 ‘고무신’, 가슴을 숙연하게 하는 ‘자유의 길’, 몽롱한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향연이 가득 펼쳐지는 ‘여치의 죽음’ 등 70년대의 아름다운 걸작들과 자유로운 실험성의 극대화된 표출을 이룬 90년대 초반의 앨범들 [기억상실](90)과 [천사들의 담화](91), 그리고 세월과 타협하지 않은 진보적 감성을 드러내는 [Eternal Sorrow](2000)와 [고민](2002) 등 2000년대 이후의 여전히 멋진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탁월하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업을 정리한 박스 세트가 많은 어려움 끝에 출시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음악 시장에서 박스 세트는 대중적 인기나 음악적 평가를 얻은 한 아티스트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The Box]의 경우처럼 전작을 모아 놓은 컬렉션에서부터 서너 장의 CD에 대표 곡들을 연대기 순으로 담은 편집 앨범, 싱글 B 사이드나 아웃테이크, 라이브 버전 등 그 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희귀한 음원들을 모은 작품 등 다양한 형태의 박스 세트들이 꾸준히 발매되고 있다. 대부분은 리마스터링을 거쳐 월등히 좋아진 음질과 정규 앨범에서 접할 수 없었던 보너스 트랙, 미공개 영상, 아티스트와의 인터뷰나 새로운 칼럼, 미공개 사진 등을 담은 충실한 부클릿 등을 수록하여 끊임없이 팬들을 유혹한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고스란히 해당 아티스트의 아카이브(archive)로 자리하게 된다. 사실 동일한 컨텐츠에 새로운 옷을 입히고 꾸준한 재생산을 통해 영속성을 부여하는 이러한 작업은 ‘기록’과 ‘보존’에 대한 개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나라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탓에 이번 박스의 발매는 더더욱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다.
박스 세트의 제목인 ‘The Box’는 한대수의 아이디어에 따라 정해진 것이다. ‘box’는 물론 말 그대로 네모난 모양의 상자를 뜻하는 말이지만 중의적(
?nr)인 의미를 담은 이 단어는 속어로 여성의 성기를 뜻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가 비롯된 곳, 그가 일생동안 갈구해왔으며 그 안에서 평화를 얻고 또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음악적 영감을 얻었던, ‘여성성’을 상징하는 단어인, 그리고 한대수의 모든 것을 담았다는 ‘coffin(관)’의 의미까지 겹쳐진 ‘The Box’는 한대수의 음악 인생을 정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말인 듯하다. 박스의 전면 커버 사진은 1969년 9월에 있었던 한대수의 첫 콘서트인 ‘드라마센터 리사이틀’ 중에 찍은, 기타 연주를 하고 있는 젊은 한대수의 역동적인 모습을 담은 컷이며, 박스 후면에 자리한 노년에 접어든 한대수의 사진은 지난 봄 사진작가 김중만이 찍은 작품이다.
이 박스 세트는 한대수가 37년 동안 음악 활동을 해온 결과물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위대한 뮤지션의 한 세대에 이르는 세월이 이 상자 안에 담겨 있다. 그는 이 세트를 위해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음원과 영상과 사진들을 내놓았다. 특히 184페이지의 부클릿에 수록된 친숙하거나 생소하고 희귀한 여러 사진들은 그가 가지고 있던 1,00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사진들 중 엄선한 것들이다. 9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2장의 라이브 앨범은 쉼 없던 그의 음악 활동의 흔적들이다. ‘행복의 나라’의 한대수만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숫자는 놀라운 것일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작업했던 구상음악이나 재즈와 아방가르드, 또는 거친 록 사운드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마지막 솔로 콘서트에 담긴 몽고 전통음악의 향연에 흠뻑 취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Et Cetera]라는 제목을 붙인,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작품들을 담은 CD에는 70년대 후반 그가 뉴욕에서 결성했던 그룹 징기스칸(Genghis Khan)의 소중한 음악과 여러 곡들의 데모 버전, 그리고 사운드트랙과 옴니버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공개되는 그의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이 박스 세트를 통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2001년부터 2003년 사이에 뉴욕과 서울에서 완성한 여덟 편의 뮤직비디오들은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상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눈에 쾌감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한대수의 모습이며 그의 내면을 가득 채웠던 소리들이라는 사실이다. [The Box]에는 한대수의 알몸이 담겨 있다. 그는 아무 것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인다. 그 적나라한 모습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우리의 몫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