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창은 욕심이 많은 음악가다. 그는 주변의 어려운 부탁과 제의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일 욕심 만큼이나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에 소홀한 법이 없다. 이우창은 멀티 플레이어이다. 한 사람이 이렇게 전방위적인 활약을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욕심은 철저히 음악에 관한 것이다. 그의 욕심은 음악가로서 일하고자 하는 욕심이며,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며, 자신의 음악을 나누려는 욕심이다. 그의 욕심은 제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는 집착이 아닌, 음악인으로서 분방한 활약을 하고 성실하게 그 책무를 다하려는 노력이며, 성실함이다.
이우창의 집안은 음악가의 집안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님 아래, 어린 시절 그는 음악의 풍요로움을 느끼며 자랐다. 그의 형은 재즈 기타리스트 잭 리이며, 그의 여동생은 자스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보컬리스트이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던 이우창은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재즈 피아니스트로 규정지었다. 그는 재즈가 좋았다. 키스 자렛, 빌 에반스, 오스카 피터슨, 칙 코리아, 버드 파웰, 델로니어스 몽크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신도 그들처럼 음악적 혼을 피아노 음에 담아내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89년부터 91년까지 뉴욕에 있는 재즈 명문 뉴 스쿨(New School)에서 ECM을 대표하는 포스트 밥 피아니스트 케니 워너(Kenny Werner), 쿨 재즈와 하드 밥, 포스트 밥의 전성기를 장식했던 드럼의 거장 치코 해밀튼(Chico Hamilton), 길 에반스 이후 최고의 재즈 편곡자로 우대되는 길 골드스타인(Gil Goldstein),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애덜리 밴드에서 활동했던 드러머 지미 콥(Jimmy Cobb),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아트 블레이키의 파트너였던 피아니스트 월터 데이비스 주니어(Walter Davis Jr) 같은 대가의 곁에서 풍부한 음악적 양분을 이양 받았다. 이후 1991-1995년까지 맨하탄 스쿨(Manhattan School of Music)에서 음악 학사와 음악 석사를 취득했다. 이곳에서 현재 링컨 센터 재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재직중인 데이빗 버거( David Berger), 1950년대 이후 With Strings 앨범의 주옥같은 명연들을 재현했던 작, 편곡자 매니 앨밤(Manny Albam), 1970년대 이후 포스트 밥 시대의 세계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재키 바이어드(Jaki Byard)를 비롯해서 해롤드 단코(Harold Danko), 에드워드 그린(Edward Green), 리치 드 로사(Rich De Rosa), 리차드 서스맨(Richard Sussman) 등의 곁에서 다양한 재즈 작법을 물려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994-5년까지 뉴욕 대학에서 재즈 작곡으로 음악 석사 과정을 마치며 튼튼한 음악적 이론적 기초를 설립하였다.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이우창의 음악으로 향한 욕심은 대단했다. 그는 단순히 유학생으로 뉴욕으로 떠났던 것은 아니었다. 1990년 세계적인 재즈 페스티벌인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참가를 시작으로, 1994년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 그리고 인디고 블루스 재즈 클럽, 웨스턴 게이트, 빌리지 게이트 등에서 자신의 트리오, 쿼텟, 옥텟 등을 조직해서 참가하는 열정을 보였다. 방학에 맞춰 한국에 들러서도 야누스, 올 댓 재즈 등의 재즈 클럽에서 선배 재즈 뮤지션, 동료들과 함께 틈날 때마다 잼 세션을 하는 적극성을 보여왔다. 그는 20대 초반이었던 1991년 워너 뮤직에서 첫 번째 데뷔 앨범 <Sphere>을 발표하여 신선한 파문을 일으켰으며, 같은 해 뉴욕에서 알게된 포크-록 뮤지션 한대수와 함께 <천사들의 담화>라는 실험적인 작품을 던져주었다. 1992년에는 <Mia>와 가스펠 앨범을, 1994년에는 <In His Time>이라는 창작물을 국내에 소개했다. 한국 재즈 뮤지션에 대한 평가가 채 이뤄지지 않았던 환경에서 그는 자신이 익힌 유학 시절의 이론과 실제를 꾸준히 발표해 왔으며, 1995년에는 <Stream>이 한국과 유럽에서 동시 발매되기도 했다. 1997년 미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음악을 하고 있던 이우창은 한대수의 후쿠오카 라이브 공연의 밴드로 초대되었으며, 1999년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미국 유학 시절 자신이 직접 조직한 이우창 빅 밴드의 뉴욕 공연 실황을 옮긴 <Woochang Lee Bigband Live in New York City'>를 통해 국내 최초의 정통 재즈 빅 밴드 앨범의 서막을 열었다. 2000년에는 뉴에이지 풍의 서정적인 솔로 피아노 앨범 <Never Too Late>을 발표했다.
이우창의 음악가로서의 욕심은 비단 레코딩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바쁜 대중 음악과의 교수이기도 하다. 그는 뉴욕 대학에서 음악 석사 과정을 밟던 시절 재즈 캄보, 앙상블을 지도했으며, 1997-8년까지 뉴욕의 The Reformed Presbyterian Theological Seminary Of The East In New York에서 재즈 피아노와 건반 화성을 강의하기도 했었다. 1999년 귀국과 동시에 수원여대, 김포대학, 서울대학교 서양 음악 연구소, 상명대학교, 동아방송대, 단국대학교에서 재즈 피아노, 작, 편곡, 재즈 화성학을 강의하며 분주하게 강단을 누비고 있다. 또한 한국의 재즈 뮤지션들과 정규, 비정규적인 팀을 결성하여 다채로운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영화 <신라의 달밤>을 비롯해서 각종 드라마 음악, 단편 영화 등을 작곡했다. 1999년에는 경기 방송에서 재즈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전방위적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이우창은 바쁜 와중에서도 <Jazz Piano Technique>, <Professional Jazz Arranging>, <Jazz 연주인 솔로곡집> 등의 재즈 이론서를 발표했으며, 더 나아가 2002년에는 음악 출판사 Notation을 설립하여 <Jazz Standard For Pianist>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다.
[자료제공 : 풍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