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쌀쌀해진 날씨가 장롱 속의 두꺼운 옷들을 꺼내게 만들고 ‘어디에서는 첫서리가 내렸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싶으면 가을은 소리도 없이 어느새 우리 곁에 와있다.
가을에도 사람들은 목말라한다. 눈처럼 거리에 내리는 낙엽에, 커피가게 문틈을 비집고 흘러나오는 커피 향에, 멋진 트렌치코트에도 열광한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어울림 하나. 듣고 있노라면 깊이 모를 감정에 빠져들게 하는 특유의 보이스와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노랫말을 뿜어내는. 바로 왁스.
물론 왁스의 노래는 봄, 여름, 겨울의 캐릭터에도 금새 녹아 들어 그 때 마다 다른 감정을 전해준다. 하지만, 가을에 듣는 왁스의 음악은 또 다르다. 그 위력은 배가 된다. 그렇다고 왁스가 그 동안 앨범을 가을에만 발표했던 것은 아니다. 가을용 가수(?)도 더더욱 아니지만. 그런데 이번엔 가을에 새로운 앨범을 낸다. 그래서 올 가을은 유난히 더 외로워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작년 2월 초에 5집 앨범이 나왔으니 꼭 21개월만이다. 데뷔 후 가장 길었던 이번의 공백은 일본에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이 기간 동안 싱글 1장과 앨범 1장을 내며 일본땅에 왁스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새기고 돌아왔다.
이번 6집 앨범은 왁스 음악의 진수만을 보여줄 수 있는 곡으로 채워졌다. 이른바 ‘왁스표’라고 불리는 주옥 같은 발라드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앨범에서 다양한 장르로 구색을 갖추던 관례를 깨고 발라드 위주의 정공법을 택했다.
왁스의 발라드의 특징은 어느 누가 들어도 자신의 얘기 같다는 것.
그런 면에서 이번 앨범 타이틀 곡인 ‘사랑이 다 그런거니까’는 이 가을에 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리게 할 것만 같다. 힘겹게 사랑을 끝냈지만 이별의 아픔은 더욱 커져만 간다. 이렇게 괴로울 거라면 왜 사랑했고 왜 이별 했을까. 사랑도 이별도 모두 바보짓처럼 느껴진다. (…바보 같은 사랑을 했었어. 바보 같은 이별을 했어. 죽을 만큼 널 사랑했는데 바보같이 그댈 보내야 했어…) 이토록 질긴 인연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체념한다. 앞으로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므로 조금이라도 그 아픔을 줄이기 위해서는 체념의 미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초월한 듯 한마디 해본다. ‘사랑이 다 그런거니까’ 어쩌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다 그런 것이다. 죽을 것만 같은 이별의 고통이 이 한마디로 달래지길 바래본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은 각각 연결되어 하나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그래서 전 곡을 다 듣고 나면 마치 한 권의 소설을 읽은 것처럼 깊은 감상에 젖게 된다.
백원짜리 동전 하나면 하늘을 나는 듯 순수했던, 그래서 아픈 사랑에서 자유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사노바 리듬에 담은 ‘파랑새’가 유년시절을 노래한다면 시골에서 갓 올라와 낯설은 서울 풍경에 좌절하던 청년 시절을 노래한 ‘목포시 청담동’은 그 제목부터 신선하다.
이제 사랑이 시작될 것만 같은 초입에서 불안한 마음에, 아직 사랑을 모르던 그 옛날을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그땐 그랬어’에 이르게 되면 앞으로 다가올 지옥 같은 사랑과 이별을 어느 새 예감하게 되고 만다.
사랑은 고통스러운 이별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라는 역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왁스가 들려주는 이별 이야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떠난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느끼게 해준다.
함께했던 많은 시간들을 접어둔 채로 막 떠나려는 사랑이 있다. 그토록 정성스레 나를 지켜주던 사람이 미안하단 말과 함께 떠나려 한다.(‘사람을 찾습니다’) 자, 이제 숨막히는 듯한 이별의 고통이 시작된다.
사랑은 떠나가고 마음은 한 자락을 베어낸 듯 비어있지만 나의 지갑이 두툼한 것은 왜일까? 조금씩 없어지는 지폐 대신, 영원할거라 믿었기 때문에 지갑 가득히 꽂아 두었던 사진들. 오늘도 지갑이 주는 두툼한 촉감은 당신의 빈자리를 많이 그리워하게 한다.(‘두툼한 지갑’)
떠난 사람에게 진심으로 물어봅니다. 사랑을 하던 순간엔 차마 묻지 못했던 말들을. 난 그때 어땠었는지, 정말 예뻤었는지, 나 때문에 행복했는지를.
(‘물어봅니다’),
하지만 헤어진 사람에게 왜 원망이 없으랴.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이별이 과연 아름답기만 할 수 있으랴. 우린 나약한 존재이므로 떠난 사람이 마냥 행복해지길 바랄 순 없는 법. 왜냐하면 그 사람이 행복해질수록 내가 더욱 초라해질 테니까.(‘엽기적인 그녀’).
하지만 사랑의 그림자는 어느곳에나 있다. 그래서 이별이 더 힘든 것이지만. 적막한 거리를 걷다가도 그냥 말없이 멈춰서 사랑을 불러본다
(‘어두운 거리에 머무른 사랑’).
이별에 취해있는데 어찌 술 한잔이 빠질 수 있을까. 술 한잔에 이별을 고한 이에게 크게 외쳐보고 술 한잔에 이별로 슬퍼하는 나를 달래어본다. 레게 리듬에 실린 아이러니한 가사가 더욱 가슴에 와 닿는’愛.酒.歌.’
6집을 듣고 그 동안 왁스의 앨범에 감초처럼 등장하던 빠른 템포의 곡이 없음을 아쉬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별만 얘기하기에도 시간이 짧은 것을. 그렇다고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별 이야기에 흠뻑 취해보다가 그래도 성이 차지 않으면 술 한잔 기울이며 “…마셔라 마셔, 추억아. 마셔라 마셔, 미련아. 마셔라 마셔, 눈물아. One Shot. Two Shot…(愛.酒.歌)” 을 외치며 이별과 이별하면 그만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