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랭했던 국내 최초의 창작 록 사운드
1962년 신중현이 록밴드 에드포를 결성했지만 록큰롤에 익숙했던 미군 병사들이 수용하기엔 시기상조였다. 신중현은 미8군 클럽무대를 떠나 일반무대에서 창작 록 사운드로 도전하는 음악적 모색을 시도했다.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당시, 창작 록에 대한 일반무대의 반응도 미8군 클럽무대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도심의 각종 음악 감상실과 KBS 등 방송에서 선보였던 신중현의 토종 창작 록 사운드에 당대 대중은 그저 ‘시끄럽다’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창작 록음악으로는 더 이상의 음악활동이 힘겨웠다.
돌파구를 모색했던 신중현은 1966년 밴드 액션스의 이름으로 연주앨범 ‘THE ACTION'S 뺀드 경음악 특집’을 발표했다. 자신의 창작곡은 <비속의 여인> 단 2곡이고 나머지 수록곡은 모두 <홍도야 울지마라>, <서울야곡>, <검은 장갑> 등 흘러간 추억의 인기가요들로 구성한 평범한 레퍼토리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연속 발매한 연주앨범 '한국의 벤쵸스 ADD4-신중현 경음악편곡 1집’에도 자신의 창작곡은 한 곡도 선곡되지 못했다. 당대의 빅히트곡인 미8군 출신가수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 최희준의 <우리 애인은 올드미쓰>, 번안 곡 <검은 상처의 부르스>등 동시대 일반 대중이 좋아했던 히트곡들을 위주로 선곡해 연주하는 평범한 구성을 벗어나질 못했다. 야심찼던 신중현의 음악적 실험과 도전과는 거리가 먼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음악적 후퇴였다.
사이키델릭 록에 전통가락을 접목하는 실험
첫 밴드 에드포를 해산한 신중현은 1966년 후반에 일반무대를 떠나 미8군 클럽무대로 돌아갔다. 미8군 클럽의 패키지 쇼를 위해 급조한 밴드 조우커스에 이어 1968년부터는 미8군 클럽 하우스밴드였던 5인조 블루즈 테트를 결성했다. 창작앨범은 엄감생신. 다행스럽게 급속하게 유입되었던 팝송 덕분에 조성된 경음악 음반 열풍을 등에 업고 살롱과 다방용 연주음반을 발표하는 소모적인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어느 날, 미8군 방송 AFKN 출연했던 신중현은 사이키델릭 기법으로 촬영한 화면에 매료되었다. 이후 사이키델릭 록에 한국의 전통가락을 접목하는 실험을 꿈꾸며 5인조 밴드 덩키스를 새롭게 결성했다.
월남공연단 참여를 염두에 두고 전쟁터로 떠날 생각까지 했던 당시 신중현의 음악활동영역은 매우 협소했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신중현은 덩키스와 더불어 펄시스터즈 데뷔음반의 세션 녹음을 맡아 일반무대 활동을 재개했다. 예상치 못했던 펄시스터즈의 대성공으로 인해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이어 발굴한 육감적인 김추자와 대중적 인지도를 지닌 인기가수 김상희를 변신시켜 일반무대에 야심차게 재도전했다. 이전에는 별 반응을 얻지 못했던 신중현의 시이키델릭 소울 사운드는 월남전 참전 등으로 답답했던 당대 젊은이들의 꽉막힌 가슴을 뚫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며 뜨거운 관심을 불러왔다.
사단을 구축한 신중현의 상업적 성공시대
덩키스 이후 퀘션스를 거친 신중현은 1971년 초부터 정성조와 손을 잡고 '신중현과 그의 캄보밴드'를 결성했다. 청년문화의 기수였던 포크음악과 자웅을 겨루며 명동의 살롱가를 휘어잡았던 상업적 성공시절이었다. 이 시절 신중현은 가수 관리를 위해 20여명이 넘는 직원들로 구성된 사무실을 운영했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 함께 음악생활을 했던 정성조는 '돈을 쓸어 담았을 정도였다“고 생전에 당시를 회고했었다. 신중현 문하의 수많은 가수들은 이때부터 ‘신중현 사단’이라는 특별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음악적으로 정점의 밴드로 평가받는 더 멘
1971년 말 정신없는 바쁜 나날을 보냈던 신중현은 자신이 지향했던 음악적 색깔이 선명했던 5인조 록밴드 더 멘(THE MEN)을 결성했다. 오리지널 멤버는 리드기타 신중현, 베이스기타 이태현, 퍼커션과 드럼 문영배, 오르간 김기표, 그리고 보컬 박광수로 구성된 5인조 라인업이었다. 새로운 밴드 결성과 별개로 신중현은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1972년 3월에 첫 개인연주음반인 ‘신중현 소울 리듬 퍼레이드-힛트송 경음악’을 먼저 발매했다. 앨범에는 <커피한잔>,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등 그의 창작 히트곡들이 대거 수록되었다.
더 멘은 수많은 신중현 밴드 중 엽전들과 더불어 음악적으로 최절정기의 밴드로 평가받는다. 1972년 10월 유신정권의 계엄령 속에서 발매된 더 멘의 첫 앨범 ‘장현과 더 멘’에는 록의 명곡 <아름다운 강산>이 수록되어 있다. 이선희 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 된 <아름다운 강산>은 김민기의 포크송 <아침이슬>과 함께 금지의 아픔을 간직한 70년대를 상징하는 국민가요로 평가받고 있다.
신중현밴드 더 멘의 유일한 연주음반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한지 1달이 지난 1972년 11월에 더 멘의 유일한 연주앨범 ‘쌕스폰의 유혹’이 발매되었다. 반세기의 세월이 흘러 재발매된 바로 이 앨범이다. 이 음반의 녹음에는 새롭게 영입된 색소폰과 오보에 등 관악기 전문연주자 손학래가 참가했다. 그의 참여로 인해 음악적 표현영역이 확대된 신중현은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앨범에 수록된 총 9곡은 밴드 덩키스 이후 작곡한 신중현의 창작곡들이다.
앨범의 문은 임아영이 처음 발표했지만 장현의 목소리로 익숙한 히트곡 <미련>이 연다. 오르간 전주에 이어 곡 전개 내내 중심을 잡고 흐르는 서정과 열정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손학래의 색소폰 연주가 5분 넘게 청자의 마음을 유혹한다. 이 앨범의 타이틀이 왜 ‘쌕스폰의 유혹’인지 첫 곡에서부터 확실하게 알려준다. 김추자의 히트곡 <나뭇잎이 떨어져서>는 독특한 기타 리프가 긴장감이 감돌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어지는 김추자의 대표곡 중 하나인 <거짓말이야>는 신중현의 기타, 김기표의 오르간, 문영배의 드럼 비팅과 어우러지는 손학래의 오보에 연주가 경쾌하다. 이어지는 역시나 김추자의 대표곡 중 하나인 <님은 먼곳에>는 <거짓말이야>에서 상승된 기분을 손학래의 낭만적인 색소폰 연주가 편안한 분위기로 진정시켜준다.
팔색조의 환상적인 색채를 그려가는 손학래의 색소폰 연주
2면 첫 곡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김추자의 데뷔곡이자 대표곡 중 하나이다. 경건한 분위기로 시작되는 이 곡은 군가 풍의 반복적인 비트가 흥을 높여준다. 이 앨범의 편곡에서 최대 화두인 색소폰은 중반이후부터 전면에 등장해 신나는 분위기를 주도한다. 수록곡 중 가장 짧은 김정미의 히트곡 <오솔길을 따라서>는 간결하게 임팩트를 안겨주는 색소폰 연주가 중심을 잡고 진행된다. 이어지는 김정미의 히트곡 <아니야>에서는 색소폰 연주가 중심을 이루지만 훅하고 치고 들어오는 김기표의 오르간 연주가 화려하다.
앨범에서 가장 긴 5분 48초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늦기 전에>는 영화로도 제작된 김추자의 데뷔 히트곡 중 하나이다. 역시나 팔색조의 환상적인 색채를 그려가는 손학래의 색소폰 연주가 김추자의 목소리를 대신하듯이 시작부터 곡의 중심을 이루며 리드한다. 곡 중간에는 오보에 연주가 치고 들어와 색다른 분위기를 조성한다. 앨범의 문을 닫는 엔딩곡 <고독한 마음>도 화려한 손학래의 색소폰 연주가 주도한다. 이 곡은 한국 사이키델릭의 여제로 평가받는 김정미의 대표곡 중 하나이다.
금관악기를 편곡의 중심에서 둔 환상적인 사운드
신중현의 활동금지로 얼룩진 비극적 운명과 함께 더 멘의 멤버들도 요주의 대상으로 낙인찍히며 음악활동에 통제가 뒤따랐다. 역설적인 것은 신중현은 이 통제의 시절에 <아름다운 강산>, <햇님>, <바람>, <봄>, <잔디> 같은 수많은 명곡을 창작했다는 사실이다. 더 멘의 유일한 연주앨범인 ‘쌕스폰의 유혹’은 신중현이 색소폰, 오보에 등 금관악기를 편곡의 중심에 놓고 시도한 첫 앨범이자 매력적인 사운드가 담긴 완성도 있는 연주앨범이란 점에서 가치가 높다. 연주 음반이기에 대중적으로 큰 조명과 소통이 없었기에 반세기만의 재발매는 의미가 각별하다. 더 멘 해체이후 한국 록 역사상 최고의 밴드로 평가받는 엽전들을 결성한 신중현은 통제와 감시가 극심했던 1974년과 활동 금지된 1975년에 불후의 연주 명반으로 분류되는 ‘신중현과 엽전들의 경음악’ 앨범 2장을 더 발표하게 된다.
***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 대중음악자료 수집연구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