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명상하는 선(禪)의 경지
-황병기의 음악 세계
앤드루 킬릭 (영국 쉐필드대학교 음악학 교수)
한국음악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황병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 즉 국악을 얘기하려면 다른 어떤 이름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국악은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음악과 전통악기를 위해 새롭게 작곡된 음악 모두를 포괄하는데, 황병기는 40년이 넘도록 이 둘 모두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는 전통음악인 산조를 그만의 독특한 형태로 발전시킨 ‘황병기류 가야금산조’를 악보로 출간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유일한 음악가인가 하면, 그가 창작한 작품들은 이제 모든 가야금 연주자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는 국내에서 이미 수많은 대학원 논문들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는 물론, 아이들 책에까지 등장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연주, 강의, 그리고 글을 통해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다. 1990년에는 남북이 함께 참가한 "평양범민족통일음악회"에서 남측을 대표하기도 했다. 만일 한 개인이 한 나라의 음악을 대표할 수 있다면, 한국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황병기라 하겠다.
그러나 황병기는 대표자이기 이전에 엄연한 한 개인이다. 이 점이 바로 그의 삶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몇몇 모순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1950년대 이후 국악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면서도 여러 면에서 보편적인 흐름을 거스른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문화재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위원으로서 정부 지원과 보존이 필요한 전통음악과 관련된 사항들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히 보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작되던 1962년 바로 그 해에 '숲'이라는 제목의 가야금을 위한 최초의 현대 독주곡을 작곡하여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에 전통음악학과가 처음 생겼을 때부터 한국 최고 수준인 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훌륭한 연주자와 음악학자 들을 길러내면서도 서양 현대음악 작곡가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새로운 연주기법을 창안했다. 예를 들어, 이 앨범의 ‘자시(子時)’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한국 악기들을 위한 새로운 연주기법들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작곡가로서 그는 여전히 외로운 주역이다. 많은 다른 작곡가들이 그의 음악에 감화되어 한국 악기를 위한 새로운 음악들을 작곡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독창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적인경향을 견인하는 동시에 인습을 타파하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모순 중의 그저 한 부분일 뿐이다. 또 하나의 모순은 작곡가로서의 그의 정체성이다. 황병기는 그 자신의 글에서 창의성이 절제된 즉흥의 형태로, 그리고 원작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을 점진적으로 다듬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전통한국음악에는 사실 서양식 개념의 "작곡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황병기는 작곡가로서 자신이 서양음악 스타일을 따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 받은 첫 음악 교육도 서양 음악이었고 처음부터 서양의 기보법을 사용하여 작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전혀 서양화한 음악이 아니다. 그의 음악에는 전통악기를 위한 곡을 쓰는 많은 동양 작곡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화성적 반주와 두터운 짜임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한국전통음악의 어휘를 넘어서면서도 언제나 분명하게 한국적이다. 황병기는 실제로 서양의 음악적 요소들을 자신의 핵심적인 음악언어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시계탑'에서 보듯이 서양음악적인 요소들을 서양이라는 지역적인 색체 효과를 내기 위해 가끔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음악에 나타난 모순을 더욱 심도 있게 보여주는 것은 그의 음악이 결코 타협하지 않는 한국적인 음악적 섬세함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청중들에게 크게 어필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첫 음반은 미국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연주는 미국, 유럽,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초기 작품 ‘가을’은 훗날 동양음악에 관한 미국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제 선율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이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의 한 예를 보여준다.
또 하나의 모순은 황병기의 현대 작품들이 혁신적인 것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순식간에 "고전"으로 받아들여져 어느새 한국전통음악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침향무’(1974)는 가야금의 전통적인 조율 방법을 변화시켰고 가야금과 장구에 파격적인 새 연주기법을 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매주 국립국악원에서 열리는 정기 전통음악 음악회 프로그램에 채택된 최초의 현대 작품이 되었고, 다른 여러 음악회에 작곡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전통음악인양 소개되기도 했다. 반면, 황병기의 전통음악 연주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배운 산조에 그만의 독창적인 선율을 보탠 점에서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은 사실 기존의 산조를 그대로 외워 연주하는 현재의 관습에 비하면 오히려 더 전통적이다. 여기서 그는 또 한 번 전통이란 보존은 물론, 창의성과도 상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음악 표면에 드러나는 엄청난 소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황병기의 개성이 모든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는 점이 또 다른 모순이다. 그의 첫 창작곡인 ‘국화 옆에서’는 거의 전통적인 가곡처럼 들리고, 이번 앨범에 수록된 '고향의 달‘은 강원도의 민요에 가깝다. 하지만 가야금과 목소리가 아우르는 ‘미궁’은 고정된 음들과 리듬의 틀을 벗어난 소리들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음악이다. 황병기는 그 자신의 소리인 한국소리를 잃지 않으면서, 시간과 공간 모두에서 한국전통음악의 소리 세계를 초월했다. 현존하는 전통 국악의 레퍼토리는 유교 조선시대(1392-1910)에 형성된 것이지만, '침향무'와 '가라도′와 같은 작품에서 보면 황병기는 신라시대(BC57-AD935)의 불교문화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바깥 세상으로 눈을 돌려 음악의 영감을 찾을 때, 그는 ‘비단길’과 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