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귀와 정신을 다 즐겁게 하는 음악이라면 단연 황병기의 가야금 음악이다. 향기, 색깔, 분위기, 영상, 느낌 등등 추상적 악상들이 명징하게, 단순명쾌하게, 우아하게 그림같이 나타나는 모습은, 젊은 시절 민속악과 정악을 다 배워 아·속(雅俗)의 경계를 공식적으로 뛰어넘은 해방후 첫세대라는 그의 위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홍등가의 기생음악처럼만 여겨지던 가야금을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공자 시대 금의 지위까지 끌어올렸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피난시절인 1952년 부산에서 처음 가야금을 익히기 시작했다. 국립국악원이 부산에서 다시 문을 연 이듬해이고, 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국악과가 설치된 1959년보다 한참 앞선 때다. 첫 창작곡 <숲>을 1963년에 써서, '창작국악'이라는 새 장르를 모색하는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도입된 '작곡'이니 개인 '작곡가'니 하는 개념이 전통음악 분야에선 아직 생소하던 때다. 음악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악보 없이 전승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유기적으로, 그러니까 핵심 가락을 유지한 채 그때그때 잔가락을 임의로 덜고 더해 가며 변해가게 마련이었다. 그런 만큼 황병기의 작품은 혁명과도 같았다.
황병기의 초기작품들은 전통 악무(樂舞) 하면 곧 퀴퀴하고 졸박함을 연상케 하던 시절에 나왔다. 한국에서 전통음악은 무지와 미신과 가난에 찌든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일제 강점과 전쟁의 상처를 내던지려는 한국인들에게 외면당했다. 반면 서구 클래식음악은 근대성과 산업화와 과학기술을 연상케 했고, 이것들이야말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식자층은 생각하고 있었다. 전통예술의 멸실을 막기 위해 인간문화재라는 제도가 생긴 것은 그 반작용이었다. 몇 년 뒤, 잃어버린 민중예술을 되살리고 이렇게 되살린 문화를 참 주인인 민중에게 '돌려주자'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인간문화재든 민중운동이든 목적은 하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미디어와 전시와 연주를 통해 확산시킴으로써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해 한국인들이 식민지 체험을 딛고 다시 한 번 역사와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 찬란한 과거 문화를 재확인하여 민족의 상처를 씻어내는 한편, 민족문화의 정수(精髓)에 다가감으로써 소외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를 통한 현재의 구원을 추구했다. 이렇게 '민족음악'은 닻을 올렸다.
황병기는 이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고 대척점에 서 있기도 하다(그는 문화재위원이면서 국제현대음악협회 회원이다). 황병기 작품 다수는 한국이 아시아의 강국으로서 대(大) 아시아 문화의 일원으로 비단길같은 교역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통일신라(668∼935)의 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킨다. 예컨대 <하림성>은 기록상 최초의 가야금 연주가인 우륵이 551년 신라 진흥왕을 위해 연주한 곳의 지명을 땄다. <침향무>는 인도 향료의 이름을 땄고, 신라풍 범패의 음계가 나오며, 지금은 사라진 중국 및 서역계 악기 공후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라져가는 예술의 수호자로서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자기 음악에 힘을 더할 길을 찾아나서는 역동적 예술가로서도 황병기는 곡을 썼다. 가야금을 위한 신곡을 쓰는 것은 물론, 자기 작품의 예술적 해석과 자기의 음악철학을 드러내어주는 글들도 써냈다. 존 케이지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구 해석한 글을 펴내기도 했다. 1985년에는 초빙교수로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글과 작품과 연주를 통해 학계와 일반대중에 던진 그의 메시지는 (그가 서울법대를 나왔다는 사실과 굳이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전통음악이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를 불식하고 근대적 지성과 전지구적 음악경제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자료 : C&L 황병기가야금 작품집 재발매 음반에 수록된 글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