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싱어송라이터의 시작,
한대수의 음악인생 40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잔치
이번 [물 좀 주소 프로젝트]는 “한국 싱어송라이터의 시작”, “한국 포크의 대부” 등으로 일컬어지는 한대수에게 바치는 동시대 젊은 뮤지션들의 존경과 사랑의 결과물이다. 이 앨범은 한대수의 74년작 [멀고 먼 길]에 수록된 ‘물 좀 주소’ 한 곡만을 가지고, 각기 다른 젊은 뮤지션들의 다양하고 재기발랄한 해석을 들어보고자하는 기획이다. 이를 위해 국내 인디씬에서 활발히 활동중인 12팀의 뮤지션들이 모여 각자의 방식대로 한대수에 대한 오마주를 풀어낸다. 수록된 12곡은 장르도, 느낌도, 해석도 극단적이리만큼 다양하다. 이는 한국의 싱어송라이터 시대를 연 한대수의 음악적 성취를 기념하는 작업인 동시에, 동시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그의 양분을 토대로 뻗어나갈 음악적 진정성과 다양성을 증명하는 작업에 다름아니다. 무엇보다, 한대수나 ‘물 좀 주소’의 음악사적 가치, 또는 음악의 예술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차치하고라도, 이번 [물 좀 주소 프로젝트]가 헌정앨범을 즐기는 새롭고 유쾌한 방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마지않는다. ? 타일뮤직(주)
음악평론가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의 추천사
한대수 트리뷰트 앨범 - [물 좀 주소]
“한대수의 데뷔 앨범 [멀고 먼 길]은 그가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6년 만인 1974년에야 만들어졌다. 김진성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를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음반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8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포크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 권용남, 베이스 조경수, 첼로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 정성조의 탄탄한 라인업과 4트랙 동시녹음을 했다. 우선 파격적인 앨범 재킷이 압권이었다. 사진작가인 자신이 촬영한,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 속의 자화상이 삐딱하게 클로즈업되어있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앨범사진과 타이틀곡은 자신이 걸어야 될 험난한 길에 대한 예고였다. 총 8곡의 수록곡 중 소홀히 넘길 곡은 단 한곡도 없다. 불협화음의 연속인 <물 좀 주소>는 한대수가 연주하는 생소한 카주(전자 풀피리소리의 느낌)소리와 함께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했지만 끝내 탄압과 금지라는 현실에 절망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되었다.”(최규성)
음악사적으로 보면, 1968년 한대수 귀국 이래 한국 대중음악씬에는 두 가지 개념이 대두되었고, 이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었다. 첫 번째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개념으로 대중음악에서 진정성을 가진 ‘창작’의 중요성을 인식시킨 것인데,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음악창작이 제작자가 아닌 뮤지션의 영역에 있어야 제대로 된 ‘작품’이 양산될 수 있었음을 알 것이다. 싱어송라이터의 중요성은 단지 가수 스스로 자기 노래를 만든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뮤지션이 뮤직비지니스의 세계에서 진정성을 가진 양질의 작품(앨범)을 생산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론’이라는데 있다. 그래서 대략 싱어송라이터의 역사는 앨범 아티스트의 역사와 일치한다. 두 번째는 ‘모던포크’의 도입이었는데, 히피문화가 절정기에 치닫을 때인 60년대 중반에 미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한대수는 당시의 음악적인 트렌드를 직수입해서 자신의 ‘창작 재료’로써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개 뮤지션들은 음악적인 트렌드는 해외의 것을 쫓지만 그 핵심에 ‘창작적인 마인드’가 부족함으로 인해서 ‘모방’에 치우진 감이 있었다. 이에 반해서 한대수의 음악활동은 혁신적인 수준이었다고 할만하다. 일례로 60년대 말에도 트윈폴리오와 같은 통기타그룹이 있었지만 ‘번안곡’을 부르는 수준이었고, 저작권 협의 없이 무단으로 타인의 노래를 부르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가수 스스로가 창작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음악사적으로 평가해서 한대수는 단지 ‘한국 모던포크의 대부’가 아니라 신중현과 함께 ‘한국 음악창작자 역사의 시작’으로 자리매김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한대수를 ‘음악평론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한국대중음악 평론’을 가능케 한 무척 소중한 인물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음악평론가에게도 평론 ‘대상’이 있어야 평론이 가능한데 그게 바로 앨범(‘작품’으로서의 음반)이고, 한대수는 신중현과 함께 ‘앨범아티스트’로서 선구자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년 8월 가슴네트워크와 경향신문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 작업을 공동으로 진행했는데, 왜 여기에 유명한 트로트나 댄스 가수들의 음반이 선정되지 않았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음악평론과 음악사연구, 앨범과 (단순)음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우문에 가깝고 어찌 보면 이게 한국 대중음악이 처한 현실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 보면 한대수 이전에서 평론의 대상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1968년 미국에서 귀국한 한대수는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당시 생소했던 ‘싱어송라이터’의 모습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파격적인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전술했다시피 ‘싱어송라이터’는 진정성을 갖는 음악창작을 하기 위한 ‘방법론’이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초반 한국에서 청년문화가 개화될 때 김민기, 양희은, 양병집, 서유석 등이 발표한 새로운 가치와 음악적 외관을 담은 앨범들은 한대수의 활동에 일정 부분 빚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대수의 디스코그라피를 살펴보는 일은 ‘한국음악창작자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과 같다. 그는 단지 머리 길고 ‘빠다’ 발음 나는 히피가 아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에 대해서는 90년대 중반까지 몰상식할 정도의 평가도 적지 않았고,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90년대 말에 들어서다.
개인적으로 2005년에 광명음악밸리축제 예술감독을 맡았을 때 생각했던 것은 신중현 이후의 트리뷰트 앨범과 공연 대상을 상정하는 것이었다. 신중현에 대한 트리뷰트 작업이 1997년에 이루어졌고, 그 이후를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한대수와 정태춘을 떠올린다. 그래서 2005년 광명음악밸리축제에서는 한대수를 헤드라이너 성격으로 올렸고, 그 다음해인 2006년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