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우림 10주년, 그리고 새로이 맞이한 Decade
1997년 앨범 “Purple Heart”로 데뷔한 자우림. 이후 1, 2년에 한 장 꼴로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기복 없이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세계 시장에 견줄만한 한국의 대표 록 밴드로 평가받아왔다.
특히, 홍대 씬으로 대표되는 인디 계열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최근 집중적인 조명을 받으면서, 그 시발점이 된 1세대 아티스트이자 메이저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전무후무한 밴드라는 점에서 자우림의 음악과 역사는 다시금 재평가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영화 ‘꽃을 든 남자’에 수록된 데뷔곡 ‘헤이헤이헤이’와 첫 음반 발매이후 2007년까지 자우림은 10년간 정말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바쁜 세월을 보냈다. 음반, 공연, 방송을 누비며 쉴 새 없이 활동하던 시간에도 일본 진출에 성공하여 한류에 물꼬를 튼 바 있고, 틈틈이 솔로 앨범은 물론 각자의 프로젝트와 사업까지(김윤아 솔로 음반, 쵸코 크림 롤스, 페퍼민트 클럽, 사운드홀릭 운영 외) 진행하며, 초인간적인 면모를 과시한 바 있다. 이는 자우림과 멤버들이 그 어떤 아티스트보다도 창작열에 불탔고, 성실히 자기관리를 해왔는지를 증명하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2006년 가을 발매한 6집 앨범과 활동을 끝으로 멤버들은 2007년을 자우림만의 안식년으로 정했고 뚜렷한 밴드 활동 없이 1년간 처음으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10년간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에 대한 깊은 보상이자, 새로운 10년을 맞이할 재충전의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지난해 자우림은 새로운 Decade를 맞이하여 과거에 비해 훨씬 보편적인 음악 스타일과 성숙한 내용을 담은 7집 “Ruby Sapphire Diamond”를 공개했다. 많은 이들은 타이틀곡으로 낙점된 ‘Carnival Amour’를 통해 ‘Bright’과 ‘Dark’의 묘한 이중성을 동시에 표출해온 자우림의 향후 10년간의 방향은 ‘철저히 밝음’이 될 것이라 점쳤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은 또 다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우림만의 묘한 이중성, 매니아와 대중 모두를 납득 시킬 수 있는 독보적인 음악성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는 감각적으로 내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근 1년 4개월이란 시간이 흐른 후 공개될 새로운 음반인 본작은 ‘과연 자우림의 음악적 방향을 지탱하는 개체는 얼마나 많은가’란 의문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Decade를 맞이한 자우림의 관록과 음악적 기대감’으로 종결되는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 자우림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음반
본작은 표면적으로 두 개의 명제에 충실하다. ‘EP’와 ‘제목이 없는 음반’이 바로 그 것.
누구보다 적지 않은 창작물을 쏟아내던 자우림으로써 처음으로 EP를 만들었다는 점은 매우 낯선 광경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음반 전체의 통일성을 고려한 작업이었다는 멤버들의 얘기로도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아무래도 앨범 혹은 정규 음반일 경우 다양한 팬들의 기호와 자우림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담는 나름의 배려가 있어야 하기에 하나의 성격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본작은 철저히 자우림의 ‘Dark’한 음악성에만 초점을 맞춘 일종의 컨셉트(concept) 음반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자우림의 앨범 타이틀은 항상 자신들이 들어온 로큰롤 시대에 대한 오마쥬를 기본으로 발군의 작명 센스를 더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의 음반 타이틀(음반 제목)을 아예 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 혹자는 ‘제목 없는 음반(untitled records)’이라는 표기를 하겠지만 담고 있는 의미 그대로 본 음반은 제목이 없다. 유례없이 제목이 없는 음반을 내놓은 배경에 대해 멤버들은 ‘정규 음반에 담지 않은 시도들을 해보자라는 의미가 강한 음반이었기에 특정 제목을 정함으로 생기는 선입견을 배제하려는 의도’라며 설명을 곁들였다. 한 마디로 본작은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제작한 음반인 만큼 리스너들 역시도 각각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스스로가 생각하는대로 감상해주길 바라는 음반인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파격적인 요소들 외에도 본작은 다양한 면에서 자우림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음반일 수밖에 없다. 음반 작업을 끝내고 멤버들은 ‘공연을 염두 하지 않은 작업이었기에 본작을 베이스로 한 투어나 잦은 방송 출연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란 공언을 했다. 사실 ‘자우림=공연’이라는 일반적인 공식에 대입하자면 결코 상상하기 쉽지 않은 대목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사후 퍼포먼스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창작 자체에만 신경을 쓸 수 있었고, 곧 철저히 감상 중심의 곡들을 담았다는 얘기로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리메이크 앨범을 제외하고는 자주 선보이지 않았던 영어 가사를 두 곡에서 선보이고 있는 점, 단순화 된 코드 진행과 짧은 패턴의 연주를 반복하며 몽환적인 면을 자아낸 점 등이 기존 자우림의 앨범들과는 상당히 차별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본작은 대중이란 중독을 극복할 스스로의 예방전 혹은 음악적 대혁신의 전조를 기대케하는 대형밴드 자우림다운 작품이자 포석이다. - 이종현(민트페이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