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 혹은 윤영배 – 그 고요한 시작
포트윌리엄에는 간판 없는 이발소가 있다. 그곳 이발사는 오랜 세월 한결같이 서로가 서로를 아는 그 동네에서 머리를 깎고 빈둥거리고 산책을 한다.
긴 시간 속에 어떤 시간을 점유하고 서서히 그 시간을 나누는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스며든다. 작가이자 농부였던 웬델 베리의 소설 속 이야기다.
소설 속 이발사를 닮은 또 다른 이발사가 기타 하나를 매고 조용히 노래를 시작한다. 곱상한 외모도, 대단한 가창력도 없다. 소박하고 또 소박하다. 그런데 그 노래는 계속해서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깊은 밤, 혹은 이른 새벽 정적 속에 들려오는 소리처럼, 그 소박한 진정성이 강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기타를 든 이발사는 윤영배이다. 신인 아닌 이 신인의 데뷔는 무려 17년 전 제 5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규호, 루시드폴(조윤석), 말로(정수월), 이승환, 이한철 등 이제 중견이 된 뮤지션들을 우르르 배출했던 전설적인 해였다.
이한철과 한 팀으로 참가하여 수상한 윤영배는 본인의 이름을 걸고 솔로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실력있는 작곡가이자 작사가로 음악계에서는 꽤 낯익은 이름이 되었다.
은자들이 가득한 하나뮤직이라는 공동체에 스며들었던 그는 장필순, 이규호, 불독맨션 등에 작사/작곡한 곡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필순의 5집에 <스파이더맨>과 <빨간자전거타는우체부>라는 독특한 노래를 선보인 이후, 장필순 음악 세계의 한 축을 당당히 책임지고 있었고, 조동익, 장필순이 이런 저런 인터뷰 때 눈 여겨 볼만한 후배로 그를 언급했다.
그의 연주와 음성은 하나뮤직의 컴필레이션 앨범 [바다]와 [겨울 노래]에 <외로운 이층집>, <길들이지 않은 새> 두 곡을 통해 엿들을 수 있었지만, 아직 그는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그가 기타 한 대 소박한 연주로 다섯 곡을 노래, 소박한 EP에 담아 조용히 세상에 내놓았다. 여기까지 오는 데 17년이 흘렀다. 시간에 관한한 발군의 지구력이다.
그 스스로 붙인 그의 이름 <이발사>가 첫 트랙이다. 기타 한 대의 연주라곤 생각되지 않는 풍성한 공간감이 빛나는 전주부터 가벼운 충격이 인다. 머리를 깎는 이야기라곤 전혀 언급되지 않는 이 노래의 두런거림은 사실 이발사의 수더분한 수다에 가깝다. 그의 전작 <빨간자전거타는우체부>를 떠올리게 하는 참신한 이미지의 곡이다.
<바람의 소리>는 보다 더 그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트랙이다. 자연, 자전거, 바람, 길 – 그의 일상을 한 토막 잘라내면 그 어딘가 야영하며 기타를 두드리는 그가 이런 노래를 부를 것도 같다.
‘시간이야 이미 나를 조금씩 더 앞서가고’ 그런 것에 아랑곳 않고 ‘길을 멈춰 쉬는 게 나아’라며 느긋하게 별을 찾고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자본주의 현대 사회 나태함이라기 보다 버트런드 러셀이 찬양하는 철학에 가까운 삶의 태도다.
<키 큰 나무>는 그 애잔함과 따뜻함이 아름다운 트랙이다.
‘땅이 너무 멀어 매일 어지러울’ 키 큰 나무는 ‘조금씩 조금씩’ 뿌리를 내리며 ‘아주 먼 곳’을 잘 볼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며 한결같이 매일매일을 살아낸다.
서두르지 않아도,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다.
최선, 최고, 최단기간에 무언가 성취하길 원하는 근현대적 삶의 방식은 고요하게 부정된다. 대신 높이 오르는 만큼 깊이 뿌리내리고 멀리볼 것을 아주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찰한다.
투박한 기타 스트로크에 꾸밈없는 저음으로 시작되는 <내 머리 타던 날>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플라스틱이 아닌 투박하지만 자연스런 나무껍질 같은 이 앨범의 질감을 극대화한다. ‘헌 드럼통’이 모자름 없이 훌륭한 욕조가 되어 한 여름날 오후 풍경을 만들어내듯 그의 기타도 모자름 없이 가장 낮은 곳의 리듬이 되었다가 가장 높은 곳의 멜로디가 된다.
마지막 트랙 <어쩐지 먼>에서 그는 이 짧은 여정을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한다.
‘왼종일 걸어도 보이지 않는’ 길 없는 곳으로의 여행일 지 모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잊혀지는’ 것을 예감하더라도, 어쩐지 먼 그 곳, 바다를 향해 오늘도 페달을 밟을 것이다.
이 짧은 앨범을 들으며, 짧지 않은 시간을 돌아 담겨진 노래들에서 도무지 뻔하지 않은, 지극히 삶 그대로를 느끼게 된다면, 그리하여 이 용감무쌍한 진정성에 경이로운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이 느리고 한결같은 그의 여행에 동행하고 싶어질 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소박하여 아름다운 소리들에, 그 여행을 후회하지 않으리란 기분 좋은 예감도 얻을 것이다.
- 2010년11월 기린그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