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PD 두번째 싱글 앨범 <스치다>
글 : 정현주 작가 (KBS COOL FM 최강희의 야간비행)
공항 가는 길에 곰피디의 싱글 앨범을 처음 들었다.
그의 음악은 길 위의 바람을 닮았다.
머물지 않는다. 지나간다.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흔들리는 모든 것이 거기 바람이 있음을 말해준다.
스쳐 지나가서 이제는 손 내밀어 잡을 수 없게 되었지만 문득 되돌아와서 우리 마음을 흔드는 기억의 순간들이 그의 앨범에는 오롯이 담겨있다.
그 날, 나는 버리고 싶어 굳이 마중 나가지 않아도 되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길 위에 나를 닮은 사람들이 버리고 갔을 기억들이 스쳤다.
수많은 그 남자가 버렸을 그 여자 이야기,
또 그만큼 많은 여자들이 버렸을 그 남자와 함께 한 순간들.
따스했던 눈빛이 차가워지고, 꼭 잡았던 손 이제 서로 다른 곳을 향하며, 애잔하기만 했던 뒷모습...
이제는 더 이상 볼 길이 없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곰피디의 싱글 <스치다> 안에는 깨끗하게 담겼다.
듣고 있으면 스쳐 보냈던 누군가가 다시 가슴을 열고 들어온다. 시간에 씻겨 담담해졌던 기억 또한 새삼 일렁거린다.
그의 1집이 일렉트로니카, 소울, 락 등 다양한 장르에 대한 접근이었다면 이번 싱글은 한결 소박하고 단순한 느낌이다. 어쿠스틱한 악기의 비중이 늘었고, 손 악기 연주도 많아졌다. 평소 해보고 싶던 장르, 발라드를 조금 더 깊이 탐구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 위로 1번 트랙 <하고 싶은 말>이 흐르자, 내뱉지 못하고 삼켰던 뒤늦은 마음들이 쓸쓸하게 마음을 흔든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했다. 사랑하니까 지키고 싶다고 말해야 했다. 사랑하니까 내 손을 놓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허공 속으로 마음이 흩어질까봐, 말이 되어 나온 내 마음이 너무 무거워 그 사람이 떠나 버릴까봐서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
잃어버릴까봐 두려워서 끝내 사랑을 잃었던 날들.
‘사랑 한다’, ‘보고 싶다’ 정말로 해야 했고, 하고 싶었던 말들이 차라리 단순했고, 단순해도 충분했던 것처럼 곰피디의 <하고 싶은 말> 역시 최소한의 악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전하지 못한 사랑을 꽉 차게 전하고 있다. 최근 곰피디와 함께 많은 작업을 하고 있는 조정치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다. ‘시간만 추억할 우리 이야기, 멀어진 것이 더 많은 우리 이야기’를 말하는 조정치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공기처럼 맑고 투명하여 더 쓸쓸하다. ‘늦어서 미안한’, ‘말할 수도 없지만 버릴 수도 없는’ 그리하여 주지 못한 사랑이 결국 가슴 아픔으로 남기 전에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길.
2번 트랙은 <물고기 자리>. 서로 닮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 받을까 두려워 상처를 감추었지만 이 노래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는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마음을 닫고’ 스스로 괜찮다며 위로를 한다. 남아 있는 것들이 상처가 될까봐 기억도, 약속도 남기지 않고 그저 안녕이라는 두 글자만 남기고 돌아서는 이별.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뒤에 남을 것도 많아서였을까. 그들은 짧게 스친 계절처럼 사랑을 했다. ‘물고기 자리’란 2월과 3월 사이의 별자리.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이상하게 짧은 계절. 그 사랑은 그처럼 짧고도 불확실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이란 함께 하는 시간의 길이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 어쩌면 짧아서 더 아쉽고, 비록 짧게 스쳐갔지만 더 진하게 향기를 남길 때도 있는 법. 마음의 간절기를 담은 <물고기 자리>는 노리플라이 권순관이 어쿠스틱 피아노와 스트링 편곡을 했고, 조정치가 기타를, 세렝게티의 유정균이 베이스를, 세렝게티 장동진이 드럼을 연주했다. 전형적인 팝 발라드로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
3번 트랙 <기억이 시간보다 느려서>는 이별 이후 누구나 떠올려 보았을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창문 밖에 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너에게 가고 싶고, 연락을 기다리는 일, 잘못 걸려온 전화벨 소리에도 가슴이 두근대는 이런 시간들이 어서 지나가기를, 하루에 한달치의 기억을 잊어 서둘러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오기를 소망해 보지만...
그런 날이 있었다. 겨우 잊었다고 생각하면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나 애써 지웠던 기억이 다시 또렷해지고, 잠들었던 가슴에 물결이 이는. 지우려고 하는 순간 기억의 파편들은 존재가 더 뚜렷해져서 그 사람이 좋아하던 빨간색이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지 이별 전에는 몰랐구나, 그 사람과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 길 위에 이렇게만 많았구나 새삼 깨닫게 되던. 사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터무니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망각의 시간들. 내일은 잊혀지길, 내일은 지워지길 바라보지만 완전히 잊혀질 내일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막막함 위로 또 바람이 불었다. 겨우 다잡은 미련을 흔드는. 시간의 느린 발걸음을 마음 위에 천천히 찍어주는 트럼펫 연주는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연주자 배선용이 맡아 주었다.
그리하여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돌려 듣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먼 북구에서 날아온 오래된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곰피디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다가 물었다.
“그래서 버렸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랑이 남긴 기억이란 애써 가볍게 만들어 바람 속에 날려 보내도 어느 새 바람을 따라 되돌아 왔으니, 버리려는 노력은 멈춘 뒤였다. “스쳐 가며 사는 것이겠지”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스쳐 가며 사는 것이겠지, 당신과 반가운 걸음으로 뛰어 오던 그 길을 걸을 때, 당신과 자주 가던 영화관을 지날 때, 당신이 좋아하던 계절을 만날 때, 옷깃이 스쳐 바위가 가벼워지듯, 그렇게 스쳐가며 가벼워지는 것이겠지. 짧은 내 대답에 친구는 괜찮으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였다.
“이 음악들 안에는 이런 위로가 담긴 것 같지 않아? 스쳐가도 아름답잖아. 머물지 않아도 소중하잖아. 그러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
맑은 겨울날, 시린 손에 스치던 따뜻한 체온을 닮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