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인디 음악씬의 소중한 보물. 가을방학과 김재훈이 함께하는 조금은 특별한 외출.
가을방학의 외출
노래를 부르는 계피와 곡을 쓰는 기타리스트 정바비로 구성된 어쿠스틱 팝 듀오 가을방학은 2010년 가을 1집을 발매한 이래, 그들과 잘 어울리는 무대에 서는 행운을 자주 누려왔다. ‘취미는 사랑’,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와 같은 노래들은 소극장을 찾은 팬들은 물론 EBS SPACE 공감 방송 및 그랜드 민트 페스타의 수변무대 등과 썩 잘 어우러지며 많은 이들의 감성을 적셨고, 이상의 작품 ‘봉별기’를 인용한 곡 ‘속아도 꿈결’을 '이상 문학콘서트'에 초대되어 부르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무대를 경험한 그들로서도 상당히 망설여졌던 공연이 2012년 3월에 있었던 ‘가을방학 클래식에 빠지다’ 무대였다. 주최측인 마포아트센터로부터 '고전음악 편곡으로 듣는 가을방학의 노래'라는 컨셉을 처음 제안 받고서, 그들은 클래식에 빠지기 이전에 일단 고민에 빠졌다. 당시 두 번째 정규 앨범 작업에 돌입한 시점에서 밴드의 에너지를 새로운 시도로 분산시켜도 될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1집에서도 다분히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스트링 사운드와의 결합을 무대에서 선보이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잔잔하고 감성적인 음악에서 현악의 사용은 자칫 잘못하면 과도한 감상주의라는 함정에 빠지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베테랑 음악감독인 이병훈이 스트링 편곡에 있어 탁월한 솜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을방학 1집을 프로듀스하면서 클래식 악기를 최대한 자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계피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와 결, 그리고 사려 깊은 가사의 내러티브로 이루어진 촘촘한 감정선 사이로 ‘클래식’이라는 클리셰가 비집고 들어왔을 때 가을방학의 색깔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떨치기 쉽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실력 있는 클래식 전공자에게 편곡을 맡기는 것으로 가장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또한 1집만 내고 끝내는 단발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팀이 된 이상 클래식 편곡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재현해보는 무대는 그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아무튼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밴드 포맷으로만 줄곧 음악을 해온 가을방학으로서는 실로 자신들의 곡 ‘속아도 꿈결’에서 노래했듯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외출이 아닐 수 없었다.
김재훈의 외출
바깥 나들이에 두려움 반 설레임 반이었던 것은 가을방학 뿐만은 아니었다. 프로젝트 앙상블 티미르호의 리더 김재훈 역시 ‘가을방학, 클래식에 빠지다’공연을 위한 편곡 작업을 의뢰받고 나서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음악학을 전공했고 연주음악 앙상블의 리더가 본업인 김재훈이지만, 대중음악과의 콜라보레이션이 낯선 일만은 아니었다. 클래식 전공생의 유쾌한 외도라 할 수 있었던 불나방스타소세지클럽에서의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을방학과 연이 닿게 된 계기인 싱어송라이터 최고은과의 협업 등 그에게 이미 홍대 라이브 클럽이나 합주실의 공기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었다.
김재훈이 티미르호를 통해 구현해온 음악적 방향성 역시 가을방학의 색깔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다. 아무런 추가적인 더빙 없이 그랜드 피아노와 현악기 관악기 각 한 대 만으로 앨범 전체를 꾸미는 티미르호의 간결성은 계피의 목소리가 유일한 소실점을 이루는 가을방학의 정돈된 풍경과 닮아 있었다. 난해함이나 스타일리시함보다는 감성과 상상력을 우위에 놓는 김재훈의 작곡/프로듀싱 스타일은 늘상 새로운 소재를 가사에 끌어오되 멜로디를 통한 청자와의 소통의 끈을 놓지 않는 정바비의 송라이팅과 맞닿아있고 말이다. 무엇보다 문학의 직간접적 인용이 끊이지 않는 가을방학의 노래들, 그리고 속지를 펼치면 김재훈이 직접 선택한 시인의 소개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티미르호의 앨범들은 마치, 놀이터에서 섞어놓으면 가장 먼저 친해지고 마는 아이들과 같았다. 다만 김재훈은 둘 사이의 커다란 공약수를 바탕으로 한껏 더 음악적 욕심을 부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많이 바꿔도 될까요.”첫 만남에서 김재훈은 스스럼없이 제안했고, 가을방학도 흔쾌히 응했다. 곡을 잘라도 좋고, 늘려도 좋다, 결과물의 퀄리티만 담보되면 곡과 곡을 접붙여도 괜찮고, 필요에 따라 가사도 새로 쓸 수 있다고 말이다. 그야말로 전권을 위임받은 편곡자는 기존의 가을방학 사운드에서 드럼 베이스 등 밴드 그루브를 구성하는 요소는 일절 배제하고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만 남겼다. 원곡에 현이 살짝 깔리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편곡이 아니길 내심 바랬던 가을방학의 생각을 멀찌감치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곡이 하나 둘 씩 자리잡아가고 편곡 의도가 조금씩 더 선명히 구현되어가면서 클래식 콜라보레이션, 혹은 챔버 팝 프로젝트 등으로 혼용되던 호칭은 ‘실내악’으로 통일되어 갔다. 가을방학은 이제 드러머가 카운트를 주고 비트가 노래박을 이루는 세계가 아닌 리드 연주자의 숨 신호에 맞춰 이탈리아어로 된 빠르기 기호를 따르는 세계, 고전적인 실내악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었다.
실내악 외출
전석 매진된 ‘가을방학, 클래식에 빠지다’공연은 대성공으로 끝났다. 주최측과 관객, 뮤지션 모두가 만족했고 가을방학과 김재훈은 결과물을 좀 더 다지고 풍부하게 만들어 앨범의 형태로 남기기로 했다. 이후 3달간의 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이 음반 <실내악 외출>에는 가을방학의 기존 곡 4곡과 신곡 2곡, 그리고 김재훈이 새로 제공한 연주곡까지 총 7곡이 수록되어있다. 음반 전체를 감도는 것은 실내악의 공간감, 흡사 너그러운 집주인의 고즈넉한 응접실에서 펼쳐지는 것과도 같은 편안함과 친밀감이다. 여기에는 소스 녹음과 믹스는 물론 6번에 걸친 연주자 리허설 내내 레코딩 장비를 공수해 다니며 악기별 집음과 전체적인 위상 설계에 대해 실험하고 고민한 사운드 엔지니어 허정욱의 역할이 컸다. 제작여건 등 현실적인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잔향감과 다이나믹을 위해 고집한 홀 녹음도 적중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대의 촉망받는 연주자들로 꾸며진 앙상블의 호흡은 이 음반만으로 끝내기 아쉬울 정도다.
산뜻한 구성을 위해 원곡의 후반부를 들어내고 새로운 가사를 담아낸 첫 번째 곡 ‘동거’, 타이틀곡이자 공연장에서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낸 바 있는 ‘여배우’가 지나면 가을방학의 2집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특히 반가울 신곡들이 이어진다. ‘피아노-클라리넷-첼로’라는 티미르호 2집 편성 그대로 계피의 노래가 얹어진 ‘한낮의 천문학’, 그리고 고전적 의미에서 로맨스가 도달하는 해피엔딩을 웃음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첫 날 밤’이다. 한편 앨범의 후반부는 발라드와 왈츠 연작이 담당하고 있다.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과 마지막 곡 ‘이브나’의 감정선을 연결하기 위해 김재훈이 새로 작곡한 1분 30초짜리 연주곡 ‘Long Story Short’은 그야말로 숨은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소품이라기 에도 짧은 러닝타임 동안 곡예에 가깝게 조 바뀜을 반복하다가 앞 뒤 곡의 음계를 마법처럼 이어놓는 지점은, ‘가끔 미치도록 네가 안고 싶어질 때가 있어’가 그리는 애잔한 이별과 ‘이브나’의 달콤 쌉싸름한 고백이 오버랩 되는 순간인 동시에 클래식과 대중음악이라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음악을 해온 두 아티스트의 화학적 결합을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마치 음악 형식을 통해 '실내'와 '외출'이라는 이질적인 의미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