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블루스’의 터줏대감 엄인호 [Anthology]앨범이 LP로 제작되어 반갑다. 동아기획을 통해 엄인호 2집 'Sweet & Blue Hours'가 발표된 것이 1994년이니 무려 21년 만에 만나보는 그의 솔로 앨범이다. Anthology가 의미하듯 이 앨범은 신보라기보다는 지난 2000년 엄인호와 재일교포 블루스 기타리스트 박보가 의기투합했던 'Rainbow Bridge'에서 엄인호 스스로 선곡한 노래들로 재구성되었다. 신촌블루스와 박보밴드의 프로젝트 앨범 'Rainbow Bridge'은 한국과 일본 동시발매를 염두에 두고 야심차게 발표했지만 제작사의 파산으로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하고 절판되었다. 2002년 2장 구성으로 재발매되었던 이 앨범은 ‘신촌블루스’의 히트곡들과 엄인호의 신곡, 박보의 창작곡이 현란하고 끈적거리는 기타 연주와 질펀한 각자의 목소리로 담겨졌지만 대중적 각광을 받지 못하고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만 입소문으로 회자되었다. 500장 한정본 '신촌블루스 엄인호 Anthology' LP로 재탄생된 이 앨범엔 엄인호의 노래들로만 선곡되었다. 새롭게 편곡된 ‘신촌블루스’의 중요 레퍼토리와 창작곡 ‘Tears Of My Love’, ‘L.A. Blues’ 등 총 9곡은 엄인호가 들려주는 한국적 뽕 블루스의 향내가 진동한다. 보너스트랙 ‘골목길’은 2015년에 재녹음된 유일한 최신 블루스 버전이다. 수록곡들의 발표 시기는 각기 다르지만 대부분 ‘신촌블루스’를 통해 알려진 노래들이다. 특히 ‘골목길’, ‘내 맘속에 내리는 비는’, ‘비오는 어느 저녁’등은 80~90년대에 故김현식, 한영애, 정경화 등 신촌블루스 출신 보컬리스트들의 절창으로 익숙한 노래들이다. 기존 곡들은 원곡의 질감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해 편곡작업에 공들인 흔적이 선명하다. 박청귀(기타), 조용수(기타), 정준교(베이스), 민재현(베이스), 이정민(베이스), 황수권(키보드), 김명수(E. Piano), 김성태(드럼), 김민기(드럼), 김준우(드럼), 천상용(Syth Brass), 이후승(Hammond Organ), 한석호(무그) 등 각 노래마다 10여명이 넘는 다양한 세션맨들의 참여가 그 증명이다. 한을 토해내 듯 거칠고 읊조리는 엄인호의 보컬은 마치 오열하듯 울어대는 기타 톤과 김옥경(내 맘속에 내리는 비는), 김선영(밤마다), 김현아(달빛 아래 춤을), 강성희(2015 골목길) 등 피쳐링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백 보컬과 어우러져 한국적 블루스의 원형질을 들려준다. 사실 엄인호의 보컬로만 진행된 곡은 ‘L.A Blues'와 ’Angie' 단 2곡에 불과하다. 각 트랙에 들려오는 무수한 여성보컬들은 이 앨범이 솔로앨범인가 의구심을 안겨줄지도 모르지만 보컬의 중심에는 엄인호의 목소리가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콜라보레이션과 피쳐링을 적절하게 시도한 앨범인 셈이다. 이 전략은 적절해 보인다. 솔직히 엄인호의 보컬은 감정을 절제하며 화려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탁월한 보컬리스트라기보다는 사랑의 아픔과 이별, 그리움, 외로움 같은 원초적인 블루스 정서를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음색으로 토해내는 거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앨범의 백미는 친숙한 멜로디에 섬세한 연주로 다가오는 첫 트랙 ‘Tears Of My Love’(엄인호 작사, 박보 작곡)다. 베테랑의 경지에 오른 엄인호의 블루스 기타연주만으로도 만족스런 이 곡은 블루지한 일렉트릭 기타연주도 맛깔나지만, 귀에 감겨오는 도브로(Dobro)와 어쿠스틱 기타 선율과 김현아의 백 보컬은 완벽한 하모니를 구현하며 청자들의 귀를 잡아끈다. 하모니카 연주로 시작되는 ‘내 맘속에 내리는 비는’은 블루스 포크 질감이 돋보이는 처절함의 끝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슬픈 곡이다. 엄인호와 김옥경의 절창 경연과 어쿠스틱 기타 연주 사이로 번지는 우울한 감성은 그 자체로 블루스다. 김선영과 함께 한 ‘밤마다’는 업템포의 레게리듬에 일렉트로닉 분위기가 더해져 혼성보컬의 매력을 배가 시킨다. ‘비오는 날의 해후’에서는 중년 남성의 외로움과 로망이 애절하게 담겨 있다. 신촌블루스의 김현식이 절규하듯 불러주었던 엄인호 작곡의 ‘골목길’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블루스의 클래식이다.
‘신촌블루스’는 정식 밴드가 아닌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고 불렀던 전문음악동호인 모임으로 시작했다. 멤버들이 수도 없이 교체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지금도 건재함을 잃지 않고 역사를 이어온 원동력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리더 엄인호다. 가수로서 그는 변변한 히트곡이 없다. 그래서 ‘가수 엄인호’보다는 ‘신촌블루스 엄인호’로 각인되었을 만큼 그는 신촌블루스의 살아있는 역사가 되었다. 신촌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방송사의 유명 어린이 음악 프로그램 '누가누가 잘하나'에서 입상하면서 남산의 옛 KBS에서 독창 발표회를 열었을 정도로 음악영재였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극심한 사춘기의 열병을 앓았던 그의 방황을 잡아준 것은 음악이었다. 이태원에 사는 친구집 3층 건물에서 연습을 하던 록밴드 ‘파이어 스톤’의 음악을 구경하면서 어깨 너머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밴드에 문제가 생겨 대타로 베이스를 맡아 이태원 클럽무대에서 가끔 연주를 했다. 학교보다는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나 아카데미 뮤직 살롱, 미도파 살롱을 들락거리다 고2때 친구들과 3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당시 신중현의 음악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그는 제임스 브라운, CCR, 아이언 버터플라이, 바닐라 퍼지 같은 흑인음악이나 싸이키델릭에 심취했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음악에만 매달리자 집안의 반대는 대단했다. 1974년 재수를 권유하는 가족들을 피해 가출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부산과 진주 등지의 음악다방을 옮겨 다니며 DJ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밥 딜런, 존 바에즈, 알로 거스리등 포크음악을 접했다. 신촌에서 기타리스트 김영배를 알게 되어 명동 해바라기 홀에서 김의철, 이정선을 만났지만 클래식한 분위기와 스타일, 취향이 잘 맞았던 김영배, 김추자 그리고 제임스 최(최중화)등과 자주 만나 연습을 했다. 김영배와는 1975년쯤부터 신촌 ‘OX’카페에서 통기타로 싸이키델릭을 연주하는 듀엣활동을 1년 정도 했다. 부산으로 내려가 음악친구 박동률을 만나 함께 대전의 ‘만년장’ 나이트클럽에서 활동하다 하숙방생활이 지겨워 다시 상경했다. 신촌의 츄바스코, OX살롱에서 머물다 지겨워지면 다시 부산으로 되돌아가는 방황의 시기를 보냈다. 1977년 부산 DJ시절, 한 여자에게 퇴짜를 맞아 울적한 기분을 통기타로 치며 곡을 쓰기 시작했다. 대표 곡 ‘골목길’은 그 시절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서며 애인의 방 창문에 불이 켜지는 풍경을 보며 만든 곡이다. 부산의 통기타 라이브 살롱 '작은 새'에서 DJ로 일하던 1978년 어느 날, 텅 빈 홀에서 술에 취해 혼자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본 살롱 사장은 그의 기타 솜씨에 깜짝 놀라며 연예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이정선, 양병집 등 포크 가수들을 서울에서 불러 공연을 했다. 그 후 이정선의 연락을 받고 상경한 엄인호는 1979년 이광조와 함께 포크 트리오 '풍선'을 결성해 정식데뷔를 했다. 서판석의 기획으로 구성된 ‘풍선’은 단 한 장의 음반을 발표하고 해체했다. “반 강제로 시작했는데, 유명해지려면 나가야 한다고 하여 '전국노래자랑' 같은 데도 나갔다.(웃음)”(엄인호) ‘풍선’은 일종의 프로젝트 편성이었다. 원래는 이광조와 둘이서 듀엣으로 시작했는데, 서판석씨의 주선으로 이정선이 추가되었다. ‘풍선’은 가사나 멜로디를 상업적으로만 포커싱했던 음반이었다. 이정선이 편곡을 맡은 그 음반은 서울스튜디오에서 마지막으로 진행한 투 채널 녹음이었다. ‘풍선’덕에 엄인호는 제법 유명해졌다. 병역 기피자였던 그는 부산 애인의 변심을 확인하고 홧김에 자원입대를 했다. 방위근무 중에 엄인호는 멤버 모두 싱어송라이터였던 박동률, 드러머 양영수(후에 라원주로 교체)와 함께 록그룹 ‘장끼들’의 결성을 주도했다. 비록 미완성이라 해도 밴드 ‘장끼들’은 한국최초로 레게음악을 시도했고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등 TV출연을 많이 했다. 서울과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장끼들’의 데뷔음반은 8트랙으로 녹음이 되었다. 장끼들은 나이트클럽 '블루 쉘'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가수왕 이용의 백밴드로도 활약을 했다. ‘장끼들’ 해체 후 엄인호는 서라벌레코드에서 1985년 테크노 팝 적인 비공식 솔로앨범을 발표했지만 그냥 묻혀 버렸다. 이후 1986년 4월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블루스를 출범하게 된다. 파랑새 극장에서 첫 공연을 열고 가수 이문세의 주선으로 87년 LA에서 해외공연도 했다. 이후 김현식, 박인수도 가담했다. 2집부터는 동아기획으로 옮겨 작업을 했다. 멤버들이 하나 둘 솔로활동을 시작하면서 유명해진 신촌블루스는 블루스와 레게를 가요에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으로 블루스 열풍을 몰고 왔다. 1989년 엄인호, 이정선 외에 정서용, 故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등이 참여한 2집은 블루스 음악에 레게, 펑키, 재즈 등을 가미해 계층을 초월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1990년 김현식이 사망하고 한영애가 나간 후 3집까지 참여한 이정선도 독립을 했다. 이후 신촌블루스의 리더로 자리 잡은 엄인호는 프로젝트 성격이 강했던 모임을 정식 밴드로 변화시켰다. 신촌블루스의 멤버 구성상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는 여성 보컬리스트다. 1집에서의 한영애, 2집에서의 정서용처럼 3집에서도 3명의 여성 보컬리스트가 참여했는데, 이번 LP에도 수록된 빠른 템포의 연주가 인상적인 "비 오는 어느 저녁"에서의 정경화의 보컬은 힘찼다. 당시 ‘맨발의 디바’로 각광받는 라이브의 여왕 이은미도 참여했었다. 록커 김동환은 90년대 초에 활동하다 솔로로 전향했고 강허달님도 신촌블루스 여성보컬리스트 계보를 이으며 ‘블루스 디바’로 평가받는 여성 블루스 싱어송라이터로 성장했다. 엄인호는 1990년 솔로 1집, 1991년 가을여행 OST, 1993년 정경화, 김목경, 조준형과 함께 만든 ‘Super Stage’에 이어 1994년 솔로 2집 때까지 라이브 위주활동을 했다. 1997년엔 일본 동경에서 열린 'One Korea Festival'에 참가했던 그는 1998년 베스트앨범 '10년의 고독'을 발표한 후 박보밴드와 서울, 동경에서 합동공연을 가졌다.
2000년 침묵을 깨고 발표한 베스트 앨범 [Anthology]가 바로 이번 LP의 뿌리다. 신촌블루스의 주요 레퍼토리를 록과 블루스 그리고 국악까지 접목시키는 새로운 편곡을 선보인 엄인호 음악의 야심 찬 시도였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아날로그 LP 붐은 정당한 평가조차 받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렸던 이 앨범의 부활에 한줄기 서광을 비춰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글.사진=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