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은 내게 마음이냐 비밀이냐”
윤제의 1집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설명하는 넷 혹은 다섯 개의 1단어.
어린 시절의 풋풋한 기억을 담벼락 삼아 노래하던 다섯 소년은 우물처럼 좁은 고향을 벗어나 수줍은 첫 고백(1집 井底之歌)을 했고, 인생의 한낮을 벗어나기 시작한 서른 언저리 ‘한 개의 달 한 개의 마음’을 세상에 선보였다. 순이네담벼락. 두 장의 앨범을 통해 그 이름처럼 우리가 잊었던 기억을 소곤소곤 들려주던 밴드에서 작사, 작곡 등을 맡았던 윤제가 2015년 5월 정규 1집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발매했다. 봄은 어른들의 사춘기. 그토록 반복해도 설렘만큼은 늙지 않는 계절, 이제 서른다섯 어른이 된 윤제가 들려주는 열 곡의 음악은 어떤 시간을 지내온 걸까. 이건 윤제의 첫 앨범을 설명하는 넷 혹은 다섯 개의 한 단어들이다.
첫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윤제가 고향 광주에서부터 함께했던 세 친구와 조화를 이루던 음악에서 떨어져 오롯한 제 목소리로 처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첫 앨범으로 홀로 서기까지 지내온 시간 동안, 윤제는 한 사람의 반려자가 됐고, 작지만 제가 하나하나 고치고 마련한 첫 작업실을 가졌다. “숲에서 우는 아이, 숨어서 우는 아이”의 우물에서 혼자가 아닌 둘의 ‘집으로 가는 길’ 사이의 시간이라고 할까. 또 다른 출발점에 서게 된 짧지 않은 과정을 담고 있음에도, 윤제의 노래에선 성급한 회상이나 어떤 주목을 향한 조바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윤제는 다만 지내온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 인연, 시절 등을 담담히 고백한다. 네 문장의 질문만큼이나 담백한 드럼, 피아노, 기타로 이뤄진 “운명”, 읊조리듯 건네는 고백 같은 ‘고스트 댄스’처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지난 시간의 고백이자 앞으로 나아갈 시간에 관한 질문처럼 여겨진다. 그리하여 “시간이 이렇게나 빨리 흘러갈 줄 알았다면 내가 아이였을 때 조금 더 천천히 달려갈 것을, 걸어갈 것을” …… “노래는 기억이 부르는 것. 그리워하면 그럴수록. 노래는 기억을 부르는 것.”이 된다.
너
(혹은)
나
(사이의)
담
(그리고)
봄
윤제의 첫 앨범에는 그렇게 홀로 깊어지는 동안 그가 함께 지내온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그것은 순이네담벼락의 정서와 같은 듯 조금은 다르게 성장한 느낌이다. “유명한 사람보단 유익한 사람이, 음악도 나눠먹는 밥상의 반찬처럼 유익하길” 바라는 윤제의 음악 곳곳에는 깊어진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난 ‘어우러짐’이 있다. 현악기의 풍성함으로 시작하는 ‘일각여삼추’는 중학생인 그에게 처음 기타를 가르쳐줬던 형의 부탁으로 만들어진 노래고, ‘언제나 봄’은 경쾌한 친구들의 코러스가 풀밭에서 소풍을 즐기듯 어우러지며 현악기, 관악기가 풍성하게 뒤받치고, 포크의 진수를 들려준다. 특히 노래가 끝날 듯할 때, 잠깐의 휴지 뒤 합창으로 한 번 더 반복되는 노래는 폭죽처럼 터지는 봄꽃처럼 경쾌하다. 록적인 느낌이 가미된 ‘애니메이션’ 등은 윤제의 음악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래라는 것은 고스란히 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거나, 혹은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의 경험이다. 그렇게 노래가 시작하고 끝나는 동안 우리는 너 혹은 나로서 존재하며 어떤 희귀한 침묵 한가운데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그렇게 너와 나 혹은 나와 너는 각자이면서 노래로 스미면서 우리가 된다. “가사나 선율보다 이미지를 우선으로 두고, 누구나 똑같이 보는 사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나의 방법으로 사물과 사람을 대하고 그 느낌을 토대로 글을 쓰거나 멜로디를” 만드는 윤제는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줬으면 하나 무관심만이 서로를 쉬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 외로움이 네 외로움일 수 있는가 내 마음은 네게 마음인가 비밀인가”란 쓸쓸한 고백은 그래서 오히려 어떤 따뜻한 위로보다 위안이 된다.
윤제의 앨범이 꽃이 지고 잎이 짙어지는 2015년 오월에 발매되는 것도 이런 마음의 우연이 아닐까 싶다. 윤제의 노래는 이 계절과 더없이 어울린다. 봄이 겨울을 거름 삼듯, 윤제의 따뜻한 노래도 어느 정도 슬픔을 자양분으로 삼은 듯 들린다. 무엇보다 오월은 사월의 다음달. 지난해 사월 우리는 바닷속으로 무참히 스러진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이제 사월을 마냥 봄으로 만끽할 수 없게 됐다. 그러니까 오월은 아픈 기억이 반복되는 첫 계절이 되어버렸고, 오월, 세상에 첫선을 보이는 윤제의 노래도 봄바람처럼 살랑이면서도 사월의 슬픔을 지나치지 않는다. “사라져간 긴 겨울밤의 꿈”을 이겨내고, “우리 함께 이 봄길을”을 걸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윤제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통해 성장과 기억, 내면과 세상의 조화를 지내오면서, 너 혹은 나, 우리라는 시간의 담벼락을 넘어 자신만의 음악을 향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기억의 담을 넘어 새로운 길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그렇게 담은 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안아주는 울타리가 되고, 또 다른 시간의 깊이가 고일 것인데, 아무래도 윤제의 ‘앞으로 지내게 될 시간’ 그러니까 ‘담(다음)’이 더욱 기대되는 까닭은 이런 바로 마음에서일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