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이름을 마음에 담는 방식에 관해
- 장필순 Reminds 조동진
한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라진 세계는 저 혼자 오롯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의 별이 자신의 중력 안에 여러 위성들을 돌게 하듯, 그 별 스스로도 어떤 별의 힘을 받으며 끊임없이 비행하듯, 세계는 서로의 자장 안에 빛과 어둠을 주고 받고,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또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춤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 하나의 세계를 마음에 담는 노래들이 도착했다. 사라진 세계의 이름은 조동진이다. 그가 떠난 지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의 음악과 그의 이름이 갖는 무게를 생각하면, 그가 떠난 자리 이후에 이렇다할 추모의 행위는 의아하리만치 드물었다. 두 번의 추모 공연이 있었으나 첫 공연은 사실상 그가 생전에 기획했던 합동 공연이었고, 그의 음악적 궤적을 정리하는 TV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의 노래를 여럿이 모여 다시 부르는 음반이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추모는 그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사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용하게 이루어졌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생전의 그와 어울리는 방식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도착한 ‘다시 부르는' 노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장필순, 그리고 조동익이다. 이들은 사라진 세계와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의 자장을 오랜 시간 주고 받으며 음악을 하던 공동체의 일원이었고 개인적인 삶의 부침을 알고 있는 가족이었다. 조동진이라는 세계가 만들어지고, 흘러가고, 변화하는 여정을 함께 지나왔기에, 그 세계와의 거리를 조절하며 독자적인 해석을 해나가는 접근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떤 해석은, 새로운 독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를 훼손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방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다시 부르기'는 가장 고요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장필순은 어느 한 소절 힘주지 않고, 나직이 말하듯 노래를 하고, 조동익은 모든 연주를, 최소의 방식으로, 혼자서 모두 감당하고 있다. 이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일은 마치, 밤의 추위를 뚫고 작은 방에 도착한 유일한 손님이 되어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나직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과 같을 것이다.
“물을 보며 나는 잊었네”(물을 보며)라는 주술같은 반복은 방관과 무심이 아니라 깊은 파고를 덮는 치열한 평안이다. 창가의 풍경을 건드리며 조용히 들어선 바람처럼, 그 바람이 몰고 온 익숙한 향기처럼 문득 들어선 기억을 이야기하며 노래는 시작된다. 계속해서 잊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무엇도 잊지 않았을 수면 아래의 이야기들이다. 물은 평탄하게 흐르고, 그 위에는 빛이 잘게 부서지며 빛날 것이다. 잊었지만 잊지 않은 기억은 슬픔을 데려온다. 그 슬픔을 지나가게 하는 방법은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슬픔이 노래와 함께 조용히 지나가도록"(슬픔이 너의 가슴에) 가만히 부르는 것이라고, 그는 지나간 미래에 이미 위로해주었다. 장필순의 음성은 공기 중에 유영하고, 조동익의 연주는 묵직한 저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천천히 묵직한 발걸음을 떼는 기억 위로, 노래는 가볍게 지날 것이므로, 마땅히 조용히 비행할 것이므로, 밤은 지날 것이다. 새로운 아침은 그래서 어떤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대는 멀리 떠났지만 “나뭇잎 지고 다시 꽃 피고”(아침이 오고, 다시 저물고) 반복되는 시간의 흐름처럼 우리는 눈물도, 사랑의 말도 나누었기 때문에 조용히 노래를 읊조릴 수 있다. 청량하고 다정하게. 발걸음이 가볍지 않은 “멀고 먼 길 돌아오며"(먼 길 돌아오며) 젖어버린 귀가는 무거움과 지친 어둠 대신 “뜰 안 가득 환하게" 밝히는 빛이 맞을 것이다. 떠난 것이 아니고 돌아오는 것이기에, 고요한 안도와 휴식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수없이 듣고, 수없이 불렀을 [제비꽃]이다. 이 [제비꽃]은 어쩌면 우리가 이제껏 들어온 어떤 제비꽃보다 더 서늘하고, 더 담담하고, 더 고요하다. 92년과 93년에 그가 불렀던 [제비꽃]에도 여백이 많았지만, 기타의 울림이 주던 온기가 어느 정도의 낭만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제비꽃]은 아주 작은 건반이 조심스럽게 회고를 시작한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절제된 플래시백은 어떤 장면도 클로즈업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마엔 땀방울"보다 “아주 멀리 새처럼 날으고 싶어"의 시선을 따라간다. 냉정하다기 보다 정중하게, 전체의 풍경을 기록하는 것처럼.
겨울, 눈송이는 조용히 내려온다. 우리는 눈 내리는 창을 바라보고 있다. “흰 눈이 하얗게" 내리는 풍경은 펑펑 쏟는 눈이 아니라 천천히 날리는 눈이고, 낮은 코러스는 묵직한 바람이 된다. 목가적인 온기가 있었던 조동진의 겨울은 장필순에 이르러 더 춥고, 깊고, 고독한 풍경이 되었다. 고요한 방 안에는 똑딱이는 시계추 소리만 들려온다. “너는 벌써 저만치 햇살 아래 달리듯" 한 낮의 빛 속으로 달려가던, 명랑함이 가득하던 [내가 좋아하는 너는 언제나]는 시간을 건너, 고요한 밤의 회상과 독백 속에 스며 들었다. 여기엔, 이미 너를 바라보는 내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너를 기억하는 내가 있을 뿐. “나뭇잎 사이로 여린 별 하나"(나뭇잎 사이로)를 되새기는 풍경에서 역시 번잡한 도시의 소음은 소거되었고 “그 빛은 언제나 눈 앞에 있는데” 돌아가야만 했던 것처럼, 소리는 가느다란 잔상을 남기며 나타났다 사라진다.
“춤 추는 듯 떨어지는 황금빛 잎사귀"(해 저무는 공원)가 날리던, 가을의 산책길은 “그칠 듯이 들려오는 먼 음악 소리"가 되었다. 나는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거나, 무언가를 골똘히 쓰고 있는 것 같다. 먼 기억을 붙잡고, 그 때의 가슴 속 불꽃을 알지만, 그 이후의 일들도 지나와버린 마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기억의 끝은, 혹은 이 나직한 대화의 끝은, “그대 창가"에 다다른다. “외로운 술잔 마주할 이 없"(그대 창가엔)는 식탁에 마주 앉는 마음이 된다. “덧 없고 힘겨운 먼 여행"을 떠나간 자리의 침묵을 견뎌야 하는 마음이 된다.
너무나 가까이서 함께했던 세계를 떠나보내고, 지나간 자리를 되새기는 대화는 이토록 고요하고 이토록 담담하다. 풍경 속으로 불쑥 들어가 눈물을 삼키지 않고, 묵묵하고 건조하게, 하지만 과장없는 정확함으로 기억하고자 하는 정중함이 있다. 당연했던 아름다움들, 원래 거기에 있는 줄 알았던 따뜻함들을 다시 새겨보는 시간이 왔을 때, 이런 정중함으로, 이런 고요함으로 마음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란다.
_신영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