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폴 10집 [목소리와 기타]
나의 기타에는 ‘LUCID FALL’이라는 낯익은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23년 동안 한결같이 새겨져 있던 그의 이름표를 본 어느 날, 문득 나는 ‘어, 너도 루시드폴이네’하며 웃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99년, 그러니까 앨범 <Lucid Fall>이 만들어지던 해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늘 함께였습니다. 노래도 함께 만들고 공연도 함께했습니다. 함께 한국을 떠났다가 함께 돌아왔고, 함께 노래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만든 이 음반을 함께 듣고 있습니다.
그는 레드 시다(red cedar)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기타입니다. 붉은빛이 도는 이 나무를 우리말로는 ‘연필향나무’라고 부릅니다. 가끔 나는 아직도 그의 사운드 홀에 코를 박고 향기를 맡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의 몸에서는 나무 향기가 납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향기입니다. 소리도 그렇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찌 들으면 밋밋한 소리. 나는 그 소리가 따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노래를 만들 때면 나는 언제나 그에게 손을 뻗었고, 기타라는 연필로 음표를 그리며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와 나, 둘만의 소리로 채운 음반을 만들고 싶다. 그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니 참 막막했습니다. 목소리가 기댈 곳이란 오직 기타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그에게 마음껏 기대다 보니 쓸쓸했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 환해진 기분도 듭니다. 아마도 그의 나긋한 온기가 조촐한 목소리를 마냥 감싸준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해 전 겨울이 끝날 무렵 우리는 함께 밑그림을 그렸고 그러다 보니 한 계절이 흘렀습니다. 또 한 계절이 지나는 동안 노래의 뼈대를 만들었고, 다시 한 계절을 지나며 노래의 몸은 살을 찌웠습니다. 우리는 노래를 몸에 새기며 자분자분 묵혀두었다가 천천히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8곡의 노래 중 세 곡은 봄에, 나머지 다섯 곡은 가을이 오면 엘피와 카세트테이프로 들려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 앨범을 위해 애써준 분들이 참 많습니다.
앨범을 캔버스 삼아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준 이수지 작가님께 가장 먼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마스터링과 라커 컷을 해준 Calyx의 Norman Nitzsche,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Ilha do Corvo의 Leonardo Marques, Svenska Grammofonstudion의 Hans Olsson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언제나처럼 함께해 준 안테나의 스태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며 괴로워하는 저를 다독이고 일으켜준 아내와 보현, 사랑하는 가족들. 모두 감사합니다.
나의 하나뿐인, 또 하나의 ‘루시드폴’에게 그동안 수고했다고, 참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루시드폴의 노래를 들어준 세상의 모든 분께 머리 숙여 인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2022년 봄
루시드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