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위한 무관객 라이브를 기록한 블랙홀의 현재 모습
음악을 좋아한다면 ‘BBC Sessions’라는 타이틀로 등장한 일련의 음반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영국의 공영방송 BBC의 라디오1 송출을 위해 녹음한 무관객 라이브실황 음원이 방송국 창고에서 나와 기록된 음반을 말한다. 사실 방송국의 음원은 휘발성 때문에 한 번의 송출로 그 생명을 마쳐야했고, 그마저도 방송의 특성상 내레이션이나 인터뷰의 BGM으로 깔리거나 온전히 전체를 감상할 수 없던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음원이 음반이라는 정식 매체에 말 그대로 ‘기록(Record)’으로 남으며 우린 스튜디오 앨범이나 정식 라이브앨범과는 또 다른 매력을 접할 수 있게 된 게 바로 BBC 세션 음반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음반은 국내 방송을 통해 송출됐던 소중한 음원들도 이렇게 정식으로 발매되었으면 하는 바람 역시도 가지게 만들었다.
KBS 전주에서 제작하는 ‘백투더뮤직’은 ‘송큐멘터리’라는 부제에 맞게 다큐멘터리와 방송국 라이브를 결합한 프로그램이다. 뮤지션과의 대담과 자료화면, 그리고 실제 라이브로 꾸미는 이 방송 역시 한정된 시간 관계로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녹음된 음원을 온전히 듣지 못하거나 아예 녹음은 했지만 방영이 되지 않는 음원도 있었다. 자칫 사장될 수도 있는 이러한 음원들이 KBS 전주와 사운드트리의 협업 아래 꾸준히 공개될 예정으로 있어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 무척 반갑다. 이번에 발매되는 블랙홀의 음원은 헤비메탈 밴드 가운데 처음으로 공개되는 백투더뮤직 음원이다.
이번에 정식 공개되는 블랙홀의 음반에는 기존 음원에 믹싱과 마스터링을 새롭게 한 두 곡과 방송을 위해 따로 녹음한 6곡 등 총 8곡이 수록됐다. 이 여섯 트랙은 2020년 2월 정식 가입한 베이시스트 김세호가 공식적으로 처음 참여한 음원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믹싱과 마스터링을 새롭게 한 두 곡 ‘삶’과 ‘달빛 아래 홀로 걷다’는 8집 [Hero](2005)에 담긴 대표곡으로, 전통음악과 헤비메탈의 접목을 실험대에 올린 곡이다. ‘깊은 밤의 서정곡’은 블랙홀의 데뷔앨범 [Miracle](1989)에 담긴 곡으로, 2001년 발표된 컴필레이션의 타이틀로도 사용될 정도로 밴드에게 있어서는 언제부턴가 명함과도 같은 곡이 됐다. 주상균은 이 곡에 대해 대학을 졸업할 무렵 세상으로 나가는 혼란스런 심경을 표현한 곡이라고 방송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33년이 지났고, 그간 멤버교체도 있었지만 원형이 흐트러트리지 않은 이 곡의 현재 시점 버전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옆을 보지 않고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블랙홀의 역사를 되짚는다는 점에서도 각별하다.
블랙홀은 리드보컬을 맡고 있는 주상균 외에 모든 멤버가 수준급의 보컬 능력을 가지고 있어 거친 헤비메탈 사운드지만 특유의 유려한 보컬 하모니를 잘 살린 곡이 많다. 이제 ‘페르귄트 모음곡’ 가운데 ‘아침의 기분’을 들으면 어김없이 떠올리게 되는 ‘네 곁에 내 아픔이’는 [Power Together](1993)에 수록된 곡이다. 블랙홀의 주상균을 중심으로 블랙 신드롬, 스트레인저, 백두산이 함께한 자선앨범으로 네 밴드의 보컬리스트가 번갈아가며 부르던 ‘네 곁에 내 아픔이’를 이제 블랙홀 멤버가 보컬 파트를 나눠 맡았다. 물론 1997년 재녹음된 베스트앨범 [Best Of Best]에도 블랙홀 버전이 담겼지만, 그때 역시 이번 녹음의 라인업과 다르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으로 접할 수 있다.
‘Power Medley’는 ‘백투더뮤직’ 블랙홀 편의 오프닝 시그널로 사용된, 장쾌한 리프를 바탕으로 한 시원스런 연주 접속곡으로 헤비메탈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곡이고, 동학혁명을 소재로 블랙홀식 멜로딕 스피드메탈의 시원스런 질주를 들려주는 두 번째 앨범 [Survive](1991)의 대표곡 ‘녹두꽃 필 때에’도 반갑다. ‘Universe’와 ‘Log In’은 각각 [Hope](2014)와 [Evolution](2019)의 타이틀과 같은 곡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비롯한 주변장르와의 퓨전을 들을 수 있는 곡으로,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하고 묵묵하게 음악적 진보를 일궈가는 블랙홀의 현재 모습을 반영한다.
데뷔앨범을 발표하고 3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블랙홀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한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대한민국 헤비메탈의 버팀목 블랙홀은 늘 불의에 목소리를 높이고 ‘언더독’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반가운 선물과도 같은 이번 앨범은 데뷔앨범의 ‘깊은 밤의 서정곡’에서부터 최근작이라고 할 수 있는 9집 앨범의 ‘Log In’까지를 한 줄로 늘어놓으며 블랙홀의 역사, 아니 한국 헤비메탈의 역사를 되짚는다. 정규앨범이 아니라 방송국 녹음 음원을 사용했지만 치밀한 계획과 안정적인 후반 작업으로 음질 역시 만족스럽다. 앞으로 꾸준히 이어질 또 다른 시리즈 역시 무척 기대된다. 단순한 기존 음악의 나열이 아니라 숨겨졌던 역사를 복기한다는 의미에서도.
글 송명하 (파라노이드 편집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