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블루스, 오랜 세월 고독과 방황의 레전드 블루스 궤적
한국의 블루스를 얘기할 때 음악인구에게 커다란 허공을 가르며 또렷이 새겨지는 이름 엄인호는 1988년 기념비적인 앨범인 신촌블루스 1집을 내고 10년이 흐른 1997년, 회고와 그리움이 퍼진 솔로 작품 <10년의 고독>을 냈다. 열정적 기쁨이나 강렬한 열의 그리고 수시로 솟아나는 공포 등과 대척을 느끼게 하는 언어지만 실은 음악가의 감성적 정체에 있어서 같은 선상에 위치한, 짝패나 다름없는 언어가 고독이다.
자기 세계 구축에 골몰한 뮤지션의 앞 얼굴이 열정이라면 정반대 뒤의 얼굴은 고독이 아닐까. 굳이 이걸 장르에 대입한다면 블루스 음악만큼 어울림이 ‘딱’인 게 없다. 한국에서는 블루스와 사실상 동의어가 된 신촌블루스는 이정선, 엄인호, 한영애, 김현식 등이 의기를 모아 1986년에 결성해 클럽공연으로 출정했다. 그룹명에 나타나듯 열정이나 음악적 환희, 재미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으면서도 가차 없는 고독의 면전과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블루스를 가요계에 툭 던진 도전의, 아니 무모한 존재였다.
그들이 나오기 전 블루스 음악은 대중음악의 토대였고 과거 일제 강점기 때부터 가요에 ‘부분적으로’ 그 요소가 차용되어 왔지만 전면 승부를 걸기에는 위험했다. 우리가 아는 블루스는 카바레, 요정 그리고 나중의 고고장과 나이트 등 춤추는 장소에서의 남녀가 만나는 순간의 배경음악이라는 퇴폐적 이미지의 (당시 용어로) ‘부르스’였다. 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미국 남부에 강제로 끌려온 흑인민중들의 신음과 회한, 분노, 미래에 대한 갈망이라는 정의는 우리와는 멀어보였고 그 음악적 선법도 대중들과 부담 없이 만나기는 어려웠다.
신촌블루스는 음악적 탈골이 아니라 정통의 미국 블루스를 이 땅에 심어보겠다는 순전한 예술적 야심으로 임했다. 대중화가 아니면 태생적 벽에 갇힐 수 있는 위험은 놀랍게도 이들의 재능에 의해 축출되었다. 이정선과 엄인호는 충분히 우리 대중가요의 속성을 알고 있었고 무작정의 미국 블루스 재현이 아닌 가요와의 퓨전을 기도(企圖)했다. 그 결과가 ‘아쉬움’, ‘바람인가’ 그리고 결정타 ‘골목길’, 거기에 이은 ‘이별의 종착역’이었다.
특히 결정적 성공을 안겨준 엄인호 작사 작곡, 김현식이 노래한 ‘골목길’은 블루스에다가 레게, 디스코, 포크의 요소가 화학적으로 결합한 하이브리드의 결정체로 대중들의 이례적 호감을 자극하면서 블루스에 드리워진 오랜 벽을 무너뜨렸다. 마침내 한국 대중가요에 블루스 히트송이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루씰’, ‘건널 수 없는 강’, ‘누구없소’의 한영애의 부상과 더불어 블루스는 마침내 가요계에 지분을 획득했다. 1988년 신촌블루스의 1집 앨범과 이듬해 2집 앨범은 음악관계자들 사이에서 걸작, 수작, 명반이라는 칭송이 뒤따랐다.
이제 블루스는 생소함은 완전히 벗었고 가요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껴안으면서 시장에의 안착이란 온전한 궤적을 완료했다. 블루스의 표정, 그것도 우리 고유의 표정을 얻었다고 할까. 거기에는 88서울올림픽과 함께 덩치를 불린 국내 음악시장의 분위기라는 시대적 협조도 있었다. 외부 상황과 멤버들의 혈흔에 의해 어렵사리 그들의 자리는 갖추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이 장수하리라고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음악 팬들 중에는 “신촌블루스가 오래갈까?” 여부를 두고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3집부터는 이정선과 기존 멤버가 떠나고 엄인호와 코러스 멤버였던 정경화만이 남았지만 중요한 것은 엄인호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이 도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촌블루스는 멤버교체 속에서도 지금까지도 버티고 견디며 존속하는, 결성부터 따지면 올해로 37년이라는 질기고도 질긴 생명선을 그려냈다.
이번 <Song큐멘터리: 백 투 더 뮤직 신촌블루스 라이브>는 여성보컬 강성희와 제니스, 남자보컬 김상우, 베이스 이상진, 키보드 안정현, 드럼 김준우 그리고 그룹이력 37년과 같은 오리지널 멤버 엄언호가 빚어낸 블루스 소리 성(城)이자 격한 호흡이다. 실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대 없는 거리’와 꾸준한 라디오의 리퀘스트가 이어진 ‘아쉬움’은 기념비적인 <1집>의 수록곡으로 전자는 강성희, 후자는 엄인호와 제니스가 노래하고 있다.
2집 <신촌블루스 Ⅱ>에 실려 있는 ‘환상’은 여기선 김상우 보컬이고 ‘골목길’은 강성희와 엄인호가 보컬 하모니를 맞췄다. ‘아쉬움’과 ‘골목길’에서의 엄인호의 걸쭉한 보컬은 열정과 고독으로 살아온 그의 굴곡진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2014년 그가 오랜 심적 혼돈을 마치고 돌아와 블루스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라이브 스타일로 녹음한 <리바이벌 앨범>에서도 ‘붉은 노을’과 ‘거리에 서서’가 선곡되었다. 노래는 각각 김상우와 제니스가 맡았다. ‘붉은 노을’은 ‘골목길’처럼 블루스에 레게의 요소를 얹어 대중적 감흥을 높이려는 엄인호 노고의 산물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는 엄인호 솔로 1집 앨범을 마쳤을 무렵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면서 반주만 있던 곡에 가사를 추가해 완성한 김현식 추모 앨범 수록곡이다. 엄인호의 솔로 2집에도 실려 있다. 그가 지향하는 진한 블루스와 싸이키델릭의 합으로 후대가 꼭 재조명해주기를 바라는 숨겨진 수작이다. 여러 힘들의 대립적 조합으로서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만의 블루스 대곡 스타일은 ‘비의 블루스’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긴 세월을 거치며 놀라운 일관성을 획득하고 틀을 고수해온 블루스맨 엄인호의 블루스 집착은 칭송되고 숭배되어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를 설명해주는 두 언어가 열정과 고독이다. 둘로 나뉜 것 같아도 그 질적 바탕이 동일하다는 것은 음악인구라면 더욱이 블루스 사람이라면 납득한다. 그 이분(二分)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낮의 활력에 밤의 형상을 부여하고, 꿈꾸는 듯한 몽상과 깨어있는 정신이 교차하며, 흐릿하지만 너무도 명료한 블루스의 매력이 여기 있다. 엄인호와 신촌블루스가 전하는 것은 그 대치하는 것 같지만 서로 포옹하는 블루스만의 묘한 정기(精氣)다. 우리는 그것에 끝내 예술적 정복을 당하고 만다.
-끝- 임진모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