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김현철은 그 비를 보며 노래를 만들어왔다. 비는 김현철의 오랜 음악적 영감이었다. 김현철 음악이 품고 있는 감수성의 원천이었다.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박학기의 ‘계절은 이렇게 내리네’에서 우울한 하늘과 비가 오는 쓸쓸한 오후를 노래했던 그의 ‘우가(雨歌)’는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첫 앨범에서 ‘비가 와’로 비의 세례를 드러냈던 그는 2집 「32℃ 여름」의 ‘그런대로’에서 이별을 고하는 연인을 향한 마음을 주저앉은 하늘과 비에 젖은 길로 묘사했다. 4집 「Who Stepped On It」에서 ‘It’s Raining’이란 제목의 연주곡을 수록하기도 했다.
물론 음악적 영감을 비에서만 얻은 건 아니다. 김현철은 눈을 소재로도 많은 곡을 만들었다. 첫 앨범에 ‘눈이 오는 날이면’이 실려 있고, 3집 「횡계에서 돌아오는 저녁」엔 겨울의 정서가 물씬 담겨 있다. 또한 그는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을 가지고도 곡을 만들었고, 그 밤을 하얗게 샌 뒤 맞는 아침을 노래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연 현상을 찬미하고 이를 빗대 노래로 만드는 걸 즐겼다. 그런 노래가 어떤 감흥을 전달할 수 있는지를 자신의 성정으로 알고 있었고, 선배 음악인들의 노래를 통해서도 배웠다. 가령 직접 부르기도 했던 조동진의 ‘진눈깨비’를 들으며 음악과 풍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를 알게 됐다. <포크송 대백과> 프로젝트에선 김종찬의 ‘비’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 노래들 가운데 김현철은 ‘비’로 주제를 정한 뒤 그에 맞는 노래를 새로 만들고 기존의 노래를 다시 불렀다. 도입부의 비와 천둥 소리, ‘투둑투둑’이라는 의성어가 주는 이미지는 이 작업을 대변한다. 새롭게 ‘투둑투둑’이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앞서 언급한 1집의 ‘비가 와’, 6집의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를 새롭게 편곡했다. 그리고 장혜진에게 만들어줬던 숨은 명곡 ‘우(雨)’를 다시 불렀다. 1989년 발표한 노래를 시작으로 각각 1994년과 1998년을 거쳐 2023년에 만들어진 비의 노래가 담겨 있지만 그 정서는 놀랍도록 일관된다. 그가 지속적으로 비와 도시(city)에 대한 노래를 불러왔고, 이를 멜로우(mellow)하게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도회적인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김현철이란 음악인의 인장처럼 자리하고 있다.
각기 다른 시대의 노래이지만 오랜 시간 김현철과 함께하고 있는 연주자들, 조삼희(기타), 이태윤(베이스), 이상민(드럼)의 연주는 일관된 무드를 제공한다. 결코 앞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게 레게 리듬을 진행하는 등 막상 연주에 집중하면 듣는 재미를 준다. 장효석(색소폰), 최재문(트롬본), 박준규(트럼펫)가 연주하는 관악기 부문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브라스 사운드가 갖고 있는 흥겨운 이미지 대신 세 명의 관악기 연주자들은 차분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솔로를 들려주며 비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비의 무드와 이미지는 김현철의 독특한 가사와도 연결된다. 김현철은 비의 이야기를 그저 서정적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장혜진의 노래로 처음 알렸던 ‘우(雨)’에 담긴 “주책도 없이”란 표현은 가사로는 흔히 쓰이진 않지만 노래가 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구절이 됐다. ‘서울도 비가 오면 괜찮은 도시’엔 “그깟 사랑 하나 때문에” 내가 어쩌다 이리됐나를 책망하는 화자가 있다. 타이틀곡 ‘투둑투둑’에선 레코드가게란 구체적인 장소를 소환하고 그 가게의 처마에서 비를 피하며 닿은 어깨를 이야기한다. 김현철은 늘 이런 일상의 언어를 가지고 입에 잘 감기는 노래를 만들어왔다.
‘투둑투둑’에 등장하는 레코드가게에 마음이 갔다. 과거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투둑투둑’에선 직접적으로 젊은 날을 회상한다. ‘비가 와’는 벌써 35년 가까이 된 노래다. 하지만 이 예스러울 수 있는 노래와 정서는 전혀 낡게 들리지 않는다. 잔잔하게 번져나가는 멜로디가 있고 정갈한 연주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 비에 얽힌 추억을 곱씹으며 흐뭇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될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여전히 말간 도시의 부드러운 팝 음악이 될 것이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비가 오면 그 공간과 장소는 더 괜찮게 바뀐다. 그 공간에 「투둑투둑」의 노래가 흘러나온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김학선/대중음악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