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중에는 주로 영국에서 지내며 이자이와 함께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1937년부터는 나중에 그의 주요 레퍼토리가 된 쇼팽의 곡에 본격적 으로 뛰어들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2차 대전이 발발 하자 이번에는 미국에 정착 실내악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 야샤 하이페츠, 에마누엘 포이어만(나중에 그레고르 피아타고르스키로 바뀜)등과 함께 했던 일련의 실내악 콘서트 역시 그의 명성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1954년에는 헐리우드를 떠나다시 파리로 향하게 되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여전히 강도 높은 레퍼토리를 주종으로 하는 일련의 콘서트를 개최 청중을 사로 잡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그를 위해서 페트루슈카 가운데 세개의 무곡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해 주었으며<피아노 랙 뮤직>을 헌정하기도 했다. 쇼팽 이래 최고의 쇼팽 연주자로 통하던 루빈스타인은 자유 분방한 낭만적 정취를 피아노에 듬뿍 담아내던 인물이었다. 매우 빠른 템포와강조된 기교, 그리고 일면 과장된 듯한 프레이징은 당시에는 매우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비평가들은 그의 연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물론 청중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지만, 직접 그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에 의하면 실연의 뛰어남을 레코드에 비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의 방대한 레코드는 그 어떤 것도 간과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윤기있고 선이 굵은 연주, 그러면서도 노래할 줄 아는 연주는 바로 루빈스타인만이 들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쇼팽의 연주는 단순히 그가 폴란드인이라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접해 볼 만한 훌륭한 것들이다. 젊은 시절 또 한 사람의 쇼팽 전문 연주자였던 호프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본인의 말처럼 그의 쇼팽 연주는 비교적 주관적이 것이었다.
대체로 어느 작품이든 주관적인 해석은 찬반 양론을 대립기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의 본질이 본래 자유로운 인간 정신의 구현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자의적인 해석이 작품의 본질에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뛰어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자유롭지만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쇼팽, 그것은 작품에 대한 기본 정서를 섭렵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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