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 본명은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Giovanni Pierluigi 로 로마 근교 팔레스트리나(고대의 프레네스테) 지방에서 태어나 ‘팔레스트리나’라는 이름으로 불리 운다. 주로 성악위주의 종교적인(카톨릭적인) 작품을 작곡한 그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음악기법인 대위법의 대가로 꼽힌다. 후세에까지 과거의 음악적 규범과 목표를 제시하고 전통을 지켜왔다는 점에서 서양 음악사의 주요한 인물로 전해진다.
152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망(1536) 이후 로마의 성마리아 마조레 교회에서 성가대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이 교회의 악장이었던 조스깽 데 프레, 피에르 드 라뤼, 장 무통 등과 같은 플랑드르 악파 혹은 이탈리아 악파의 거장들에게서 음악을 배운 그는 19살이 되던 해 자신이 태어난 팔레스트리나 지방의 오르간 주자 겸 합창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1547년에는 루크레치아 고리 Lucrezia Gori와 결혼해 세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이 당시 팔레스트리나 지방의 주교로 선출된 교황 율리우스 3세의 지원을 받아 1551년에 그는 성 피에르 대성당의 소년 성가대 지도자의 자리를 얻게 된다. 이후 교황의 총애를 받아 교황전속 가수가 되었다.
그러나 1555년, 종교적인 곡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곡도 작곡했던 그는 기혼 남성이나 세속적인 작품을 쓴 모든 작곡가를 바티칸에서 추방하려고 한 파울로4세의 영향으로 성 조반니 인 라테라노 교회에서 악장 자리를 얻어 1560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1571년 그는 로마의 성 피에르 대성당에 복직했고 1594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이곳에서 맡은 바 임무를 다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한편 불운의 시절을 겪었는데, 로마에 페스트가 유행하자 1572년부터 1580년에 걸쳐서 아내, 형제, 그리고 세 아들 중 두 아들마저 잃은 것이다. 아내가 죽은 후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적도 있으나 생각을 바꿔 이듬해인 1581년 모피상(毛皮商)의 부유한 미망인 비르지니아 Virginia Dormuli와 재혼했다. 그는 새로 맞이한 아내의 사업에도 흥미를 갖고 참여해 사업가로서도 성공을 했으며 뛰어난 작곡가로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또한 그는 현재의 로마 국립음악원인 ‘아카데이마 디 산타 체칠리아’를 창설한 사람이기도 하다. 1950년 그의 친구이자 오라토리오회의 창시자 필리포 네리와 함께 그는 음악가 동업조합인 베르투오자 캄파니아 디 무지치 디 로마를 창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로마 국립음악원의 모교인 셈이다.
그는 100여 개의 미사곡(4성-8성)과 300여 곡이 넘는 모테트, 그리고 또 100곡에 가까운 세속 마드리갈까지 다작을 남겼다. 이들 중 대부분의 곡은 종교작품인데 교황 마르첼리의 미사, ‘에테르나 크리스티 Aeterna Christi’, ‘시온을 찬양하라 Lauda Sion’, ‘성모 피승천의 미사 Assumpta est Maria’, ‘증성자(證聖者)의 미사 Iste Confessor’, ‘보라 거룩한 사제를 Ecce Sacerdos Magnus’, ‘무명(無名) Sine Nomine’ 등이 대표적이다. 이 미사곡의 대부분은 다성곡에 바탕을 둔 패러디 미사곡이다. ‘롬므 아르메(무장한 사람) L'Homme armé(1570)(1582)’나 ‘나는 버림받았다 Je suis déshéritée(1593)’ 는 단선성가의 멜로디를 Cantus Firmus(정선율)로 채용해 이를 소재로 다양한 모방기법을 사용한 순환형식의 곡이다. 또한 앞서 언급된 교황 마르첼리의 미사는 일관된 주제 없이 자유형식을 지닌 미사곡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들 미사곡은 모두 단일리듬의 ‘글로리아 Gloria’와 엄격하고 실라빅한 ‘크레도 Credo’, 일반적으로 움직임이 크지 않았던 저성부의 경쾌한 도약과 선율을 갖는 ‘베네딕투스 Benedictus’ 등으로 음악적 구조가 비슷하다.
현존하는 400여 개의 모테트 작품 중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Sicut cervust desiderat’, ‘바빌론 강가에서 Super flumina Babylonis’, 서로 응답하는 두 개의 합창에 의한 8성의 ‘스타바트 마테르’, ‘솔로몬의 아가(雅歌)에 의한 모테트집’ 등이 대표적이다. 이 곡들은 4성에서 12성에 이르는 다양한 다성기법으로 작곡됐으며 통모방(通模倣) 형식을 따른다.
‘다성 종교음악 예술의 전형’으로 불리 우는 팔레스트리나의 작품은 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균질적인 성격을 지닌 탓에 아카펠라 종교음악의 규범이 되어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창출케 했다. 이 양식은 후에 안젤로 베라르디 Angelo Berardi (음악의 신비 Arcanti Musicali[1690])나 요한 요제프 푹스의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1725)에 의해서 체계화됐다.
by denk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