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악사에 있어 17-8세기 바로크시대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 ‘바흐(Bach: 독일어로 작은 ‘시냇물’이란 뜻)’ 라는 이름과 달리 거대한 ‘바다’와 같은 역할을 했던 음악가이다. 이전시대 음악의 중심지였던 이태리와 프랑스의 서로 다른 음악적 경향을 하나로 통합하고 ‘평균율곡집’을 통해 서양 클래식 음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는 1685년 3월 독일 중부지방 루터파교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해 부모의 사망으로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오르간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1700년에는 뤼네부르크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루터파의 교육을 받고 교회 합창단원으로 참여하면서 북독일악파의 종교음악을 접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그는 바이마르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일하며 연주경험을 쌓는 한편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도 일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연주법과 작곡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하게 된다. 이 당시 작품으로는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등이 있다. 1707년 중부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이동한 바흐는 오르간주자로 일하며 교회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고 7명의 자녀를 갖게 되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칼 필립 엠마누엘은 음악가로 성장하게 된다. 결혼한 이듬해 그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중요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코랄전주곡>과 같은 오르간 작품이 있다.
그는 한편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태리악파의 음악을 접하게 된다.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을 알게 된 그는 당시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 곡으로 편곡을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가 협주곡을 작곡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1717년 말 그는 바이마르 궁정악단에 실증을 느끼기 시작하고 괴텐으로 이주한다. 새로운 인물을 찾고있던 괴텐궁정에서 그는 좋은 경제적 여건을 누리며 자유롭게 창작활동에도 전념할 수 있게되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3곡,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총 6곡,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이 이 시기에 나온 명곡들이다.
1720년 그의 아내 마리아 바르바가가 사망하자 이듬해 35세의 그는 안나 막달레나와 재혼했다. 그리고 그녀를 위한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 <프랑스모음곡>과 장남 프리데만을 위한 <인벤션>과 <평균율클라비어곡집>등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이 당시의 작품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반영하듯 밝고 활기에 넘친 곡들이 대부분이다.
1723년에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1750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27년간 그 곳의 교회음악가로 지냈다. 그는 그곳에서 합창단 연습과 기악 및 성악 개인교습을 하며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을 맡았다. 매주마다 교회에서 연주될 칸타타를 작곡했던 그는 이 당시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이 넘는 교회칸타타와 <마태수난곡>을 포함한 수난곡들, <마그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했다. 이 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이밖에도 많은 세속적인 내용의 칸타타와 클라비어 협주곡을 작곡했으며 만년에는 대위법적 기법을 이용한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미완성)> 등 또한 작곡했다. 말년에 급속히 나빠진 시력과 뇌졸중으로 인해 고통 받다가 1750년 7월 28일, 과다 약물 복용으로 인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로 사망했다. by denker.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