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태우
글렌 굴드 (Glenn Gould, 1932-1982)에 대해 Oxford의 'Musician Dictionary'에서는 'Canadian Pianist, Composer and Writer'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굴드는 '전위예술가'라고 불리어야 옳을 것이다. 길지 않았던 그의 생애에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약한 것은 10년 남짓한 시간이며 오로지 레코드를 통해서만 청중들과 접할 수 있었던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 정확히는 바흐의 음악 - 에는 살아 숨쉬는 듯 한 생명력이 있었고 일반인의 상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기괴함과 참신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골드베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평균율'이 주는 지루함을 의식할 수 없게 한 것도 바로 굴드였다. 그는 연주회장과 결별함으로서 청중 앞에 서는데에 사용될 노력을 절약했으며 남아도는 열정 전부를 레코드 제작에 투자하였다. 굴드는 우리가 좋지 않은 의미로 흔히 이야기하는 '짜집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의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 '짜집기'에 대한 그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중에 대한 거부감과 편집, 합성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음악'에의 매료, 굴드를 대표하는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음악가 (musician), 혹은 연주자 (performer)라고 부를 수 없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굴드의 생애
굴드의 다소 유별난 연주방식과 음악 해석은 음악을 배운 환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듯이 보 인다. 굴드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1932년 9월 25일에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그 (Edvard Grieg)는 굴드 외고조부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굴드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바이얼리니스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오르간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많은 전기에서 굴드의 어머니를 '피아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연주회를 가지는 음악가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굴드가 10살이 될 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작가인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굴드의 이웃집에 살던 아홉 살 때에 그를 만났다 (당시 굴드 역시 아홉살이었다). 그는 " 어린아이인데도 글렌은 고독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듯이 연습했다.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음악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완전한, 무조건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 교사는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였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 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시험에 합격하고 최고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으며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1952년까지 계속해서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당시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 - 굴드는 "피아노는 슈나벨에게 있어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베토벤에 대한 접근이었다" 라고 평했다 - 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고 전한다. 1946년 그는 로얄 코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고 그 음반의 모든 뉘앙스를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주하는 데에 다소 각오가 필요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다음 해에 굴드는 같은 협주곡을 토론토 심퍼니와 연주하였고 어떤 비평가는 "그는 교수들 사이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였지만 그들과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 위엄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연주를 가졌다 (굴드는 뉴욕을 'Debutown'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다음 날 CBS와의 녹음계약을 맺었다.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에 CBS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이 때에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이미 유명한 일화가 되어 버렸지만 여기에 간단히 소개한다.
-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결국 이 때 제작된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굴드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로 만들게 된다.
1957년에 굴드는 러시아 (당시 소련)에서 2주간 연주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순회연주를 가졌다. 그는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에서 연주한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으며, 청중과 비평가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이 연주를 해내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유럽순회동안 굴드는 베토벤의 3번 협주곡을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연주하였으며 두 사람은 이후 서로의 예술에 대해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고 한다.
1960년에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 뉴욕 필과 함께 미국 텔레비젼에 처음으로 출연했다. 그는 캐나다의 TV에서 이미 유명인물이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캐나다의 TV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였다.
그런데 굴드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다. 공식연주회에서 이토록 빨리 은퇴한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이 그의 많은 다른 관심사들을 실현하는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실 굴드는 그 자신의 본업이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는 작가로서의 활동, 방송활동, 작곡, 지휘, 그리고 기술적인 갖가지 시도들에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과 똑 같은 열정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1981년에 굴드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26년전에 녹음했던 장소에서 골드베르크변주곡을 두 번째로 녹음했다. 굴드는 변주들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고 보다 큰 전체 속에서 하나의 리드미컬한 파동, 화성, 그리고 근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개체들로 해석함으로 이전의 녹음과는 전혀 다른 두 가지의 해석을 남겼다. 굴드는 기술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이 만들어주는 가능성을 언제나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의 녹음이후 25년간 이루어진 녹음 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굴드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재녹음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데에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그의 데뷔 레코딩 곡이기도 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신녹음은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된다. 굴드는 이듬해 1982년 10월 4일 토론토에서 51세의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사망한다.
- 이상 굴드의 생애의 일부는 SONY의 글렌 굴드 공식 홈페이지 (http://www.glenngould.com/)에서 수정, 번역한 것입니다.
특유의 옷차림의 굴드
굴드의 음악
위의 간략한 그의 일대기에서도 소개되었듯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콘서바토리를 졸업했지만 유럽이나 미국에서 별도의 음악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굴드의 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음악의 중심지'가 그의 성장환경에서 빠져 있는 것이다. 굴드는 빈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모스크바에서도 음악을 배우지 않았으며 19세기의 흐름을 이어받은 대가들에게 사사받은 일도 없었다. 그 영향이었는지 그의 음악은 고전적인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템포의 설정도, 프레이징 도, 장식음의 처리도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여기에 기괴한 그의 성격까지 더해져서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상천외한 굴드의 음악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굴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의 몇 가지 특징을 이야기했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 못지 않은 중요한 특징으로 음악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빼놓을 수 없다. 유럽에서 활동한 음악가와는 달리 미국 대륙에서 활동한 덕분에 비교적 풍부한 영상자료가 남겨져있어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기괴한 표정과 허밍, 고무로 만든 놀라운 의자, 호로비츠 못지 않게 '불량한' 연주자세 등을 비교적 생생히 관찰할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특이점은 그의 음악에의 몰입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취하는 제스츄어를 모두 쇼맨쉽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굴드의 연주자세는 청중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집중력이라는 의미에서 굴드는 바흐 전문가인 칼 리히터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다. 독일적인 전통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굴드는 바흐의 음악에 잠재하는 본질을 확실히 이끌어 내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을 정도로 자유롭게 바흐를 연주했다. 그는 현대 피아노를 사용하였고, 주법도 바흐시대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굴드가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은 그 자체가 바흐의 연주에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우리가 그 동안 잃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악보를 있는 그대로 소리로 만들어내는 행위의 무미건조함을 굴드는 의표를 찌르는 연주를 통해 새삼 느끼게 해 주었던 것이다. 바흐가 그의 곡을 작곡하는 도중에 도취되었음에 분명한, 약동하는 생명력을 굴드는 극히 현대적인 형태로 다시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굴드의 음반을 들어보면 깃털처럼 가벼운 터치와 호로비츠를 연상시키는 영롱한 트릴, 때때로 어이없이 빠르거나 혹은 느린 템포, 지나칠 정도의 논-레가토 주법을 자주 접할 수 있지만 결코 큰 음량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와 협연한 지휘자들은 굴드의 음량이 비교적 작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바흐 시대 악기의 작고 변화가 없는 소리를 염두에 두고 연주를 했던 것 같다. 굴드는 오래된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수리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피아노는 매우 가벼운 건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종종 굴드의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스피드는 아마도 이 피아노의 특성인 듯 하다. 굴드가 만드는 소리는 과격한 해석과는 반대로 매우 섬세한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 내기를 원했던 음색의 미묘한 차이, 주법의 극적인 변화는 연주회장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직 레코드만을 통해 - 눈의 미세한 결정을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듯이 - 그는 자신의 말을 다할 수 있었다.
결국 레코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굴드의 음색은 매우 예쁘다. 호로비츠의 스카를랏티 소나타를 들어봐도 이와 유사한 예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소니의 SBM기술이 한 몫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훨씬 이전에 발매된 CBS의 오리지널 음반을 들어 봐도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굴드의 깔끔하고 예쁜 음색은 여전하다. 아마도 굴드는 녹음과정에서 피아노 소리의 의도적인 수정을 가했던 것 같다. 이것은 현대 피아노가 가지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기술적인 (음악외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굴드의 '창의력'의 산물이다. 아직까지 굴드가 살아 있었다면 그는 서슴없이 컴퓨터를 이용한 음향과 트랙의 합성에 몰두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단순히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은 굴드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남겨져서 평생을 거기에서 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굴드는 아무 거리낌없이 새로운 음악의 창조에 골몰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굴드의 바흐가 기적적으로 훌륭한 연주들임에 비해 모차르트나 베토벤, 브람스 등의 연주에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바흐의 연주에서는 충분히 허용되고 새로움을 줄 수 있었던 자유로운 발상들이 그 이후의 음악에서는 그다지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베토벤 당시와 현재의 악기 자체의 차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바흐 이후의 작곡가들은 분명히 '피아노'라는 악기를 위해 음악을 만들었고, 따라서 표현의 폭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굴드의 '전위'는 바흐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23번 소나타를 들어보면 바흐 때와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해석은 분명히 참신한 것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1악장의 듣는 이를 초초하게 만들만큼 느린 템포에서 기존에 듣지 못했던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많이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바흐 때와 같은 음향상의 매력은 아무래도 훨씬 뒤쳐져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소나타들에서는 어느 정도 참신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지만 베토벤 이후에는 해석상의 참신함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굴드가 오르간이나 쳄발로를 연주한 음반을 들어보면 그다지 정통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작곡 당시의 악기를 사용하는데 굳이 기괴한 해석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고 느낀 것일까?
굴드는 본질적으로 청중을 싫어했다. 그는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청중일수록 연주자에 대해 가학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러한 적의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연주회장을 기피하였으며 청중의 비판적인 의견이 자신의 창조적인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 굴드의 이런 생각은 연주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놓은 음악에 대해 인터넷 공간에서나마 이래저래 평가하고 때로는 공격까지 하는 필자의 입장에선 마음에 걸리는 점이다. 연주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음악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는 견해도 가능하다. 그것은 단지 받아들이는 쪽의 입장일 뿐, 연주자는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한 것이기 때문이다. 굴드가 기계적인 편집과 조작을 즐겼다고는 하지만 그 행위에 일말의 사심이 없었다는 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기 위한 행위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선구자'로서의 굴드에 대한 평가를 다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글쓴날짜: 1999/10/0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