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균의 음악 여정
초등학교때부터 영어 가정 교사 곁에서 능숙한 영어 회화가 가능했던 김도균은 종교, 철학, 물리, 역사, 우주 등에 폭넓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천체 물리학자였다고 한다. 중, 때부터 전기 기타와 바이올린을 배웠던 김도균은 획일적인 제도권 교육이 싫었다. 똑같은 기계적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가 싫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지막으로 기타에 인생을 걸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을 듣고 학교가 아닌 산으로 올라가서 교과서가 아닌 기타로 자신의 미래를 설계했다.
1985년 그룹 솔로몬에서 활동하던 시절 유현상(보컬), 김주현(베이스), 한춘근(드럼)과 함께 백두산을 결성해서 이듬해 데뷔 앨범 [Too Far! Too Loud! Too Heavy!]를 발표했다. 백두산은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와 함께 한국의 헤비 메탈 음악의 르네상스를 견인했지만, 1987년 2집 [The Moon on the Baekdoo Mountain]을 발표한 후 해산했다.
김도균은 일찍부터 한국의 국악에 관심이 많았다. 백두산 시절부터 그의 기타 솔로에는 국악적인 멜로디 라인과 리듬 패턴이 종종 선보이고 있었다. 이런 국악을 향한 김도균의 도전은 첫 번째 솔로 앨범 [Center of the Universe]에서 공개되어, "국악과 서양의 록이 접목된 새로운 스타일이 시도된 역작"이라는 세인의 평가를 얻었다. 조악한 음질과 국악에 대한 미약한 이해로 김도균의 실험은 다소 가려진 감은 없지 않았으나, 그가 행했던 한국적인 록, 국악과 록의 접목은 우리나라 대중 음악계에 신선한 파문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989년, 김도균은 록, 헤비 메탈의 본고장인 영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영국 출신의 뮤지션들과 함께 '사랑'이라는 그룹을 결성해서 활동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시나위 출신의 보컬리스트 임재범, 솔로몬, 시나위, 카리스마를 거쳤던 베이시스트 김영진, 솔로몬 출신의 드러머 유상원과 함께 한국 헤비 메탈 음악의 드림팀이라고 불렸던 '아시아나'를 결성했다. 일본의 헤비 메탈 밴드 'Loudness'와 조인트 공연을 하고, 국내 최초로 영국에서 레코딩한 [Out on the Street]가 발표되었다. 김도균은 단 한 장 뿐인 아시아나의 앨범에서도 특유의 '가야금 주법'을 과시했으나, 이 화려한 함선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92년에는 유현상이 탈퇴한 백두산을 재결성, 리더로서 백두산 3집을 발표했다. 자신의 사인 끝에 언제나 'Keeping Rock'을 새기는 김도균은 1989년 [Rock in Korea], [Power Together]와 같은 프로젝트 앨범에 참여해서 록의 부활을 시도하지만, 댄스 음악과 힙 합으로 무장된 새로운 세대의 감성을 뚫지 못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김도균은 1992년 이후 CCM 음악 활동을 하며, CCM 프로젝트 앨범 [빛으로 모두 함께] 참여, 1997년 미국 최고의 크리스찬 록 밴드 'Petra'의 내한 공연에 스페셜 게스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95년부터 MBC TV 국악 프로그램 [샘이 깊은 물]에 고정 출연하면서 대중들에게 아직도 그의 국악과 록을 결합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연구가 식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1997년에는 한대수의 후쿠오카 라이브 밴드로 참가하면서, 한대수-이우창과의 음악적 공조를 이어왔다. 1999년에는 그동안 홀로 심취했던 국악-록의 연구에 다양한 록 밴드 활동을 해왔던 후배 베이시스트 배찬우, 드러머 박동식과 함께 오늘의 김도균 그룹을 결성하며, 상호보완의 관계에서 음악적 진일보를 기했다. 2001년 한대수 [The Last Concert]에서 김도균 그룹의 세 명의 멤버는 기타-베이스-드럼으로 공연의 중추를 담당했고, 2002년 6월 서울 독립 예술제와 10월에 있었던 Musicscape Euro Andes Korean Music Festival에 참가하면서 대중들의 검증을 받기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2002년 9월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기타리스트들이 한데 모인 프로젝트 앨범 [기타 제우스]에서 타이틀 곡 'Occupants'를 연주했으며, Kbs와 국악 중심이 공동 기획한 앨범 [아리랑] 참여했다. 그리고 김도균 그룹이 4년 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유보한 채 오직 연구에만 전념했던 국악-록의 해법이 2002년 11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이라는 타이틀로 발표하며, 좁은 한국이 아닌 넓은 세계 시장으로 우리 음악을 전파하기 위한 첫 걸음을 옮겼다.
<b>김도균 그룹 1st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b>
김도균 그룹의 첫 번째 앨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은 한대수-김도균-이우창의 프로젝트 앨범 [삼총사](3CDs)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앨범이다. 애초 이 앨범은 한대수-김도균-이우창의 간단한 협연을 기록할 예정이었다. 김도균은 그룹이 아닌 솔리스트로서 흔한 록과 블루스 연주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대수의 [The Last Solo Concert] 연습 과정에서 훔쳐봤던, 그리고 세 사람의 일상적인 팀 연습에서 목격했던 합심된 에너지와 그들의 음악이 빚어내는 무시무시한 공명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몇 주에 걸쳐 그들을 설득하고 회유했다. 삼고초려를 거듭한 끝에 기타리스트 김도균이 아닌, '김도균 그룹'의 음악을 허락 받았다. 그들은 김도균이 국악과의 시도를 시도한지 15년, 김도균 그룹이 결성되어 상호간의 국악과 록의 결합을 공동 탐구했던 4년간의 노력을 음반의 형태로 담기 위해 요구되는 정리의 시간, 연습 환경, 그리고 3개월 이상의 레코딩 시간을 원했다. 나는 당연히 협조했고 덕분에 김도균 그룹이 오랜 시간 연마했던 '록과 국악의 해후'라는 비법서 제 1권을 출반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그냥 미국의 록 음악을 옮기는 록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우리에게 록을 가르쳤듯이, 우리도 그들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새로운 음악을 찾고자 한다"
김도균은 198-90년대 우리나라 록 음악의 역사를 견인했던 백두산, 아시아나의 기타리스트였다. 진작부터 그의 이름은 한국 록 기타 계보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지만, 김도균은 구차하게 자족적인 명성에 안주하지 않았다. 김도균의 국악과 록을 접목하는, 새로운 음악적 대안을 찾는 도전은 15년전인 1988년에 발표된 [Center Of The Universe]에서 점화되었다. 이후에도 그는 아무도 밟지 않은 신문명을 찾기 위한 외로운 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행한 노력과 탐구심이 구체적인 성과로 탄생할 수 있었던 출발지는 혼자가 아닌 그룹의 이름으로 자신과 함께 한국적인 록, 국악의 현대화, 록의 세계화를 표방하는 음악적 동지를 얻으면서였다. 바로 김도균 그룹의 결성이었다.
김도균 그룹은 1999년에 결성되었다. 무당의 기타리스트였던 최우섭의 권유에 의해 국악-록의 접목이라는 길을 홀로 걸어가고 있던 김도균의 곁을 베이시스트 배찬우와 드러머 박동식이 지켜주게 되었다. 배찬우와 박동식은 10여년 동안 록의 정신을 지키며, 폭넓은 음악 활동을 전개하던 친구였다. 두 사람은 김도균이 함께 국악, 그리고 한국적인 록을 공부해 보지 않겠냐는 제의에 따라, 1999년 김도균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그들은 국악을 배우는 것, 새로운 음악을 모색하는 것을 큰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행했던 일체의 활동, 계획을 접고, 김도균 그룹의 이름으로 수련과 연구에 전념하며, 매주 월, 수, 금 4년동안 연습실에서 국악 이론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배찬우는 직접 거문고를 레슨 받았으며, 박동식은 사물놀이를 배우기도 했다.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아니면 평생이 걸릴지 모르는 모험이지만, 우리의 젊음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정말 큰 게임이다. 때로 주변에서 비웃음을 치거나 우리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는 눈길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10년 후에 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 아무도 우리의 노력을 관심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 셋이 함께 하는 4년간의 긴 연습과 대화의 시간은 음악의 본질, 새로운 음악의 미래를 찾아가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배찬우는 다양한 음악적 재능으로 무장되어 있는 영민한 아티스트였다. 그 역시 누구보다도 음악적 욕심이 많았다. 그의 방안은 작은 스튜디오처럼 레코딩 장비, 프로그래밍 장비, 미디 장비, 샘플링 장비 등 사운드 시스템으로 가득 차 있다. 한쪽 벽에는 10여 개의 베이스가 진열되어 있다. 작, 편곡, 미디 작업, 뮤직 프로그래밍, 그리고 엔지니어로로서도 다양한 재능을 겸비한 배찬우는 김도균 그룹의 국악과 록의 이질적인 공간을 주선하는 생명줄인 프로그래밍, 미디 시퀀싱을 김도균과 함께 완성했다. 실제로 그는 긴 호흡의 베이스 음을 직접 설계했으며, 레코딩에 선보이는 다양한 기타 톤을 잡는 데에도 배찬우는 일조했다. 작은 것까지 철투철미하게 챙기는 섬세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김도균 그룹의 상호보완적 관계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박동식은 너그럽고 묵묵한 성품을 지닌, 드러머이다. 그의 드러밍은 화려하지 않지만, 다채로움을 함유하고 있다. 청중을 압도하는 폭발적인 타법 보다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한 박 한 박을 새길 줄 아는 리듬 키핑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김도균 그룹에 참여하면서부터 그는 사물놀이와 국악기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병행함으로써, 이미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자신만의 드럼 방법론을 찾은 듯 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존경하는 세계적인 드러머 데이브 웨클처럼 록과 재즈, 월드 뮤직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소리를 찾고자 하는 다부진 포부를 지니고 있다. 그가 꿈꾸는 것은 한국적인 리듬감, 자신만의 그루브를 완성하여 우리 음악에 내재되어 있는 장단의 세계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여전히 국악은 우리에게 낡은 것, 지루하고 따분함으로 버려져 있다. 국악의 대중화를 쉽게 말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씨름 대회의 막간 행사로 듣는 "에헤야데야"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 버린다. 고도화된 정보화 시대에서 세계의 모든 음악을 수용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좋아해야 한다"라는 논리는 억지이자 모순이다.
김도균 그룹의 첫 번째 앨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은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낡은 구호에 구걸하지 않는다. 이런 캠페인성 카피는 우리 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강요할 뿐이다. 우리 것에 대한 눈 먼 사랑을 요구할 뿐이다. 김도균 그룹은 국악의 객관적 우수성을 현대적인 어법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우리 전통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창조적 계승을 위해 21세기의 음악 요소, 사운드 개념을 적용했다. 늘상 말로만 부르짖는 국악의 세계화, 우리 음악의 세계 진출은 세계인의 공감, 변모하는 시대 언어와 발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묵묵히 15년간을, 4년간을 연습실에서 음악적 정진을 거듭했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가까이에서 들으며, 그들의 비타협적인 음악적 신념을 접하며, 음악적 동경을 넘어선 인간적 존경심을 느꼈다. 그들은 장인이었다. 그냥 음악하는 기계가 아닌 음악을 예술로 수용하는 아티스트이자 새로운 문명을 제시하는 스타일리스트였다.
김도균 그룹의 첫 번째 앨범의 타이틀은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이다. '정중동'은 따분하고 지루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국악의 음악적 본질을 지칭한다. 우리의 귀가 놓쳤던 빈 여백 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호흡과 긴 떨림은 '고요속에 존재하는 역동성'이다. 록은 서양의 것이고 국악은 우리의 것이다. 록은 오늘의 것이며 국악은 어제의 것이다. 김도균 그룹이 내 놓은 음악적 결실은 공간(서양-동양), 시간(현재-과거)로 분리된 문화에 대해 시, 공을 초월한 음악적 진화를 제시하고 있는 조용한 혁명(Movement on Silence)이다.
김도균 그룹의 김도균-배찬우-박동식은 단호하게 말한다.
"이것은 첫 걸음에 불과하다. 현 시점에서 우리가 준비한 것을 정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의 작업이 록을 듣는 사람들이 국악에 대해, 국악을 듣는 사람들이 서구 음악에 대해 견문을 넓혀가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면 만족한다. 우리 역시 록에 대해 이제 겨우 국악의 깊이와 록의 힘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보인다. 우리는 변함 없이 국악과 록을 결합한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완성하기 위해 교만하지 않고, 한 걸음씩 전진할 것이다. 지켜봐 달라."
<b>김도균 그룹 1st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 수록곡</b>
'김죽파 가야금 산조(진양)'는 국악 음반 [샘이 깊은 물] 시리즈를 통해 국악 팬들에게 널리 전파된, 가야금 산조의 대표적인 류파이다. 김창조-한성기-김난초(죽파)에 의해 완성된 김죽파 가야금 산조는 다채롭고 풍부한 농현과 색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되는 고도의 연주 기술을 요구하는데, 김도균 그룹은 산조의 가장 느린 궤적에 해당되는 진양조를 재현한다. 김죽파 가야금 산조의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묘미를 가야금과 유니즌으로 풀어내는 김도균의 전기 기타, 대점, 소점을 분명하고 박력있게 진양조의 리듬 양식에 철저한 배찬우, 박동식의 리듬은 국악-록이기 보다 그 자체로의 국악이다. 후면에 흐르는 미디 시퀀싱은 진양조의 음악적 특성을 패턴화 시켜, 현대적인 사운드로 풀어내는 김도균 그룹의 음악적 핵심이다.
'쑥대머리'는 판소리 여섯 마당 중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춘향전]에 수록된 한 대목이다. 춘향이 옥에 갇혀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신세 한탄을 하는 장면을 소리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중모리로 불려지는 '쑥대머리'는 모든 판소리 명창들이 불렀지만, 그 중에서도 국창 임방울의 해석이 으뜸으로 평가된다. 그가 소리한 '쑥대머리'는 193-40년대 한국, 일본, 만주 등지에서 100만장이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앨범에 수록된 '쑥대머리'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SP판을 복각, 마스터링, 리마스터링의 과정을 거쳐, 김도균 그룹의 연주를 덧입힌 것이다. 또한 소리-고수의 협연으로만 기록된 음원에 김도균 그룹과 가야금 협연으로 반주를 하고, 원곡을 1부, 2부로 나눈 후 전주, 간주, 후주를 매겨 완연한 오늘의 곡 형식으로 바꾸고 있다. 산 너머의 비석도 눈물을 흘렸다는 임방울의 혼이 실린 목소리에 드럼과 베이스는 중모리의 리듬 패턴과 기복이 심한 원곡의 진동을 암기하여 고수의 역할을 배가시킨다. 슬라이드를 이용한 김도균의 일렉트릭 기타는 또 다른 추임새 역할을 하는데, 특히 후주 부분에 쏟아지는 솔로 연주에서는 과거 솔로 앨범에서 엿볼 수 없는, 완숙의 경지에 이른 김도균의 '가야금 주법'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동살풀이'는 전남 무가(巫歌)에 쓰이는 장단으로 호남우도(湖南右道) 농악에 사용되기도 한다. 무가에서는 자진살풀이, 도살풀이와 함께 살풀이에 사용되는 살풀이 장단의 하나이며, 안당장단, 오방진 가락이라고도 한다. 고풍스러운 한국 전통 무용 '살풀이'의 특징인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미를 최대한 구현하며, 서양의 록 음악의 격렬한 양식을 적극적으로 최대하여, 우리 음악의 신명남을 추출하고자 했다. 특히 기타, 베이스, 드럼의 딜레이를 살풀이 장단에 정확하게 적용하기 위한 수학적인 적용을 기함으로써, '동살풀이' 고유의 느림과 빠름, 고요함과 격렬함의 대비와 조화를 구성지게 다스리게 있다. 원곡의 급작스런 반전, 드라마틱한 전개의 요소는 '동살풀이'와 '록' 음악의 동질성이다. 김도균의 기타 연주의 특징인 강인한 힘과 기타, 베이스, 드럼에 걸린 딜레이, 미디 시퀀싱, 프로그래밍에 대한 면밀한 계산으로, 일렉트릭 록이 국악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 함수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음악 문화가 조화와 대비의 관계로 질서 있게 묘사되고 있는 김도균 그룹의 오랜 수련의 결과가 확인된다.
'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Blue Bird Suite'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전래 민요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주음을 각각 다른 형식의 3부 구성의 조곡으로 변형시킨 모음 곡이다. 누구나 알 수 있는 국악 작품 하나를 재해석 하자라는 제작 준비 과정에서 여러 곡의 국악 명곡을 대상으로 논의하던 중,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배경이 동학 혁명과 녹두 장군 전봉준에 대한 헌시였음을 떠올리며, 가장 적합한 텍스트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선정되었다. 동학 혁명과 녹두 장군은 서구 열강에 맞선 우리네의 가장 적극적인 방어, 저항의 상징이기에, 김도균 그룹이 향하는 '맹목적인 서구 록의 추종에 반하는, 우리 식의 록'이라는 뜻과 일맥상통함한다는 의견을 찾으며 모두가 이 곡의 연주를 반겼다. 3부 구성의 나눔은 곡의 분위기, 연주 스타일, 음악의 시, 공간적 배경, 동-서, 국-양악의 이동을 고려하여 설정, 구획하였다.
Part 1(Past)에서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주음이 [영산회상]에서의 '염불 도드리'와 유사함을 설명하고 있는데, 국악기인 거문고(김영란)와 대금(오경수)의 2중주가 중심이 된다. 기타는 사운드 효과로서만 짧게 언급되고, 후반부에 가서 베이스와 드럼이 가볍게 장단을 맞추는 형국이다. 1부는 고전적인 국악의 느낌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시간적으로는 고대, 공간적으로는 한국(동양)을 의미한다.
Part 2(Present)에서는 1부를 이끌어 오던 거문고와 대금의 패턴이 그대로 이양되고, 기타-베이스-드럼에 의한 록 스타일의 연주가 일순간에 증폭되면서 1부의 정적인 흐름을 동적으로 이동시킨다. 곡의 분위기도 동양에서 서구로, 고대에서 현대로 이동한다. 이런 점진적인 변화는 러시아의 작곡가 무소르그스키의 클래식 작품 '전람회의 그림'의 주제부 섹션으로 절정을 이룬다. 피아노(방정인)와 트럼펫(이주한)으로 대표되는 클래식-재즈의 주력 악기를 등장시키면서, 동-서, 국악-록-클래식-재즈의 다양한 세계의 공존을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통해 함께 표현한다. '전람회의 그림'의 언급은 김도균이 연습 과정에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전람회의 그림'의 주음이 흡사함을 발견하고, 우리 국악과 클래식 음악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라는 의견에서 채택된, 근거있는 삽입이다.
Part 3(Future)는 2부에서의 국악-록-클래식-재즈의 혼재를 무너뜨리고, 김도균의 민속 음악(Ethnic Music) 풍의 기타 멜로디가 두텁게 짜여진 리듬을 비집고 나오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일신한다. 스타카토로 끊어지는 기타 멜로디는 동양의 현 악기를 통칭하는 의미로서 사용되며, 기타 암(Arm)에 의한 플레이는 국악기인 징, 쇠납, 태평소와 같은 악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21세기 음악의 진로가 동-서의 문화적 소통에 의한 월드 뮤직에 있음을 염두에 두며, 록과 국악, 더 나아가 월드 뮤직?공간을 분주히 오가며, 초월적인 음악관을 제시하고 있다.
'일렉트릭 산조'는 김도균 그룹의 첫 번째 앨범 [정중동(靜中動), Movement on Silence]의 백미이다. 산조(散調)는 '허튼 가락'이라는 뜻으로, 주로 남도의 시나위 가락을 일정한 장단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을 말한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등의 전통 악기에 각각의 산조가 있는데, 엄격히 말하자면 이 앨범에 수록된 '일렉트릭 산조'는 산조의 형식에 근거한 산조 류의 일렉트릭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산조의 진행은 일반적으로 장단의 가속에 의해 진양조-중모리 장단-중중모리 장단-자진모리 장단-휘모리 장단으로 진행되면서 점진적으로 속도감이 더해지는 음악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김도균 그룹은 휘모리 장단은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무당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도달할 수 있는 장단이라는 견해를 들어,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구성된 4부 구성으로 '일렉트릭 산조'를 실험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국악에서의 산조는 40분 이상 지속되는 대곡인데, 여기에서는 레코딩을 위한 23분여의 짧은 산조를 선보인다. 김도균 그룹은 국악의 리듬 패턴 양식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산조의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장단의 정형성을 최대한 곧게 따라간다. "알면 알수록, 익히면 익힐수록 심오함을 느끼게 되는 국악의 세계를 이번 앨범에서 모두 담아낼 수 없기에, 국악의 음악적 핵심 중 하나인 장단에 대한 이해만이라도 충실히 기하고 싶었다. 3개월의 레코딩 준비, 3개월의 스튜디오 레코딩 과정에서 "산조를 뚫어야만 나머지를 할 수 있다"는 김도균 그룹의 의지 때문에, 앨범에 수록된 테이크를 완성하는데 꼬박 1달이 걸렸다. 특히 김도균 그룹이 국악과 록을 접목하기 위한 접선인 미디 시퀀싱은 산조의 장단의 특성을 수학적 연산으로 계산하여 루핑(Looping, 반복 재생)함으로써, 국악 록을 현대적인 사운드로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진양조'는 산조에서 가장 느리게 느껴지는 장단(메트로놈 기준 ♩=35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진양조는 1장단 24박, 6박 1각으로서의 4각 구조로 정의되는데, 여기에서는 1장단 18박, 6박 1각으로서의 3각 구조로 해석하고 있다. 많은 음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 속에 분명한 음악적 공명을 담아냄으로써, 고요함 속에 큰 움직임을 포함하는 '정중동'이라는 국악의 핵심을 담아내고 있다. 긴 호흡의 베이스와 하이 햇 심벌로 진양조의 장단을 명확히 새기는 드럼은 고요함 속에 큰 움직임을 포함하는 '정중동'의 핵심을 관통한다.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고 장식음 중심으로 여백미의 표현에 주력하고 있는 김도균의 기타 플레이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중모리'는 메트로놈 기준으로 =84∼92의 공간에서 운용되는데, 보통 빠르기의 12박으로 1박을 4분 음표로 나타내면 4분의 12박자에 해당된다. 통상적으로 첫 번째 박과 9번째 박에 강세를 매기는 특성이 있다. 박동식의 하이 햇은 중모리의 정박을 정확하게 매기며, 스네어에 강하게 새겨 넣는 드럼 플레이는 중모리의 액센트를 분명하게 전달해 준다. 이러한 '중모리'의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하며, 김도균 그룹은 보다 직접적인 화술로 이야기 구성을 전개한다. '중모리'는 판소리의 서술적인 대목이나 서정적인 대목에 널리 사용되는데, 슬라이드를 이용한 김도균 특유의 벤딩-가야금 주법은 '한오백년'의 주선율을 응용한 솔로로, 국악의 음악적 주제인 애끓는 한의 정서를 구성지게 풀어낸다.
'중중모리'는 중모리 보다 조금 빠른 =80∼96 빠르기를 지니고 있으며, 조금 빠른 12박으로, 1박을 8분 음표로 나타내면 8분의 12박자가 된다. 중모리와 마찬가지로 첫 번째 박과 아홉 번째 박에 강세를 매기며, '새타령', '사랑가', '강강술래' 등의 타령, 민요에 널리 쓰이는 장단이다. 진양-중모리에서 리듬 악기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베이스가 국악에서 널리 운용되는 짧은 악구를 반복(리프, Riff)하며 연주하는 솔로, 기타와의 댓구, 유니즌은 '중중모리' 장단에 내재된 신명남을 한껏 고조시킨다. 흔들림 없는 리듬감을 연장하고 있는 드럼 역시 한층 가열된 에너지를 리듬에 전달하며 상승된 곡의 분위기를 일구어낸다.
'자진모리'는 매우 빠른 12박으로 =80∼110에서 운용되며, 1박을 8분 음표로 나타내면 8분의 12박자가 되거나 일반적으로 3박을 묶어 1박으로 치기 때문에 4박이 1장단이 된다. 주로 민속악이나 판소리에서 긴박한 대목의 묘사에 널리 쓰이는 자진모리에서는 드럼과 베이스가 짜놓은 건실한 리듬의 틀 위에 격렬하게 울어대는 국악적인 김도균의 기타 솔로가 압권이다. 암 플레이에 의한 연주는 징소리처럼 울어대고, 가야금과 해금, 거문고의 농현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완숙한 벤딩 주법은 '뱃노래', '새타령'의 변주를 업고 강한 호소력으로 밀려든다. 어느날 김도균 그룹의 악기에 신명이 내리던 날, 1달 동안의 무수한 번복을 업고 단 한번에 레코딩되었다. 김도균은 연주가 끝나고 나서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극도로 달아오른 에너지와 신명남을 멈추기가 더욱 힘들었다고 했다.
[정중동 라이너 노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