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시집 올 때 가져온 꽃신 한 켤레 고리짝 깊이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쳐다만 보고, 닦아도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쳐다 보고, 닦아만 보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낮은 논둑길 따라 번져가누나 노을도 없이 해는 서편 먼산 너머로 기울고 흩어진 지푸라기 작은 불꽃들이 매운 연기 속에 가물가물 눈물 자꾸 흘러 내리는 저 늙은 농부의 얼굴에 떨며 흔들리는 불꽃들이 춤을 추누나 초겨울 가랑비에 젖은 볏짚 낫으로 그러모아 마른 짚단에 성냥 그어 여기 저기 불 붙인다 연기만큼이나 안개가 들판 가득히 피어오르고 그 중 낮은 논배미 불꽃 당긴 짚더미 낫으로 이리저리 헤집으며 뜨거운 짚단 불로 마지막 담배 붙여 물고 젖은 논바닥 깊이 그 뜨거운 낫을 꽂는다 어두워가는 안개 들판 너머, 자욱한 연기 깔리는 그 너머 열나흘 둥근 달이 불끈 떠오르고 그 달빛이 고향 마을 비출 때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소작 논배미엔 짚더미마다 훨 훨 불꽃 높이 솟아오른다 희뿌연 달빛 들판에 불기둥이 되어 춤을 춘다
"올 봄 전주에서 우리에게로 소포 하나가 전해졌습니다. 그 속에는 사랑했던 아들을 잃은 비통한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편지와 열아홉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그의 아들 '장하다' 군의 유고 시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보람있는 삶을 원했던 아이,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원했던 아이, 사랑과 우정... 그리고 꿈 꿀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원했던 아이... 너무나 맑고 고운 심성을 가진 우리의 아이들이 이 땅의 잘못된 현실, 잘못된 교육의 숨 막히는 강요 속에서 얼마나 절망하며 고통스러워 했는지... 그래서, 결국엔 스스로의 목숨을 던져 절규의 종을 울리는 한 마리의 새처럼 이 땅 모든 아이들의 고통을 알리고자 그는 그의 너무나 짧은 생을 마감하며 살아서 그가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전하는 그의 슬픈 시들을 남기고 여기 우리들로부터 떠나갔습니다. 해마다 이렇게 떠나가는 이백여 명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그의 노래가 여기 있습니다. 긴급 동의를 구하는 그들의 노래가 있습니다." 봄 햇살 드는 창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모란이 피는 이 계절에도 우린 흐느껴 저 교회 지붕 위에 졸고 있는 비둘기 어서 날아가라, 계속 날아가라, 총질을 해대고 그 총에 맞아, 혹은 지쳐 떨어지는 비둘기들 음... 그래, 우린 지쳤어 좋은 밤에도 우린 무서운 고독과 싸워 기나긴 어둠 홀로 고통의 눈물만 삼켰네 아, 삶의 향기 가득한 우리의 꿈 있었지 노래도 듣고, 시도 읽고, 사랑도 하고 저 높은 산을 넘어 거친 들판 내닫는 꿈 오... 제발, 우릴 도와줘 내가 사랑한 것들 참 자유, 행복한 어린 시절들 알 수 없는 건 참 힘든 이 세상의 나날들 안녕, 이제 안녕, 여기 나의 노래들을 당신에게 전할 수 있다면 안녕, 모두 안녕, 열 아홉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안녕, 부디 나의 노래 잊지 말아 줘
우리는 긴긴 철교 위를 달리는 쏜살같은 전철에 지친 몸을 싣고 우리는 그 강물에 빛나던 노을도 진 아, 어두운 한강을 건너 집으로, 집으로 졸며... 우리는 신성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의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창백한 그 불빛 아래 겹겹이 서로 몸 부대끼며 사람의 슬픔이라는 것이 다른 그 무엇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는 곳도 이 열차의 또 다른 칸은 아닌가 아, 그 눈빛들 어루만지는 그 손길들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어서는 안 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 무거운 눈꺼풀이 잠시 감기고 깜빡 잠에 얼핏 꿈을 꾸지 열차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찬란한 햇빛 세상으로 거기 사람들 얼굴마다 삶의 기쁨과 긍지가 충만한 살 만한 인생, 그 아름다운 사람들 매일처럼 이 열차를 기다리는 저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 아니, 우리들 모두를 태우고 아무도, 단 한 사람도 내려서는 안 되지 마지막 역과 차량 기지를 지나 열차와 함께 이 어둔 터널을 박차고 나아가야지, 거기까지. 우리는 꿈을 꿔야지. 함께 가야지. 우리는
문승현이는 쏘련으로 가고 거리엔 황사만이 그가 떠난 서울 하늘 가득 뿌옇게, 뿌옇게 아, 흙바람... 내 책상머리 스피커 위엔 고아 하나가 울고 있고 그의 머리 위론 구름 조각만 파랗게, 파랗게 그 앞에 촛대 하나 김용태 씨는 처가엘 가고 백선생은 궁금해하시고 "개 한 마리 잡아 부른다더니 소식 없네. 허 참..." 사실은 제주도 강요배 전시회엘 갔다는데 인사동 찻집 귀천에는 주인 천상병 씨가 나와 있고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왔다. 나 먼저 커피 주라 나 먼저 커피 주라 저 손님보다 내가 먼저 왔다 나 먼저 줘라. 나 먼저 줘라." 민방위 훈련의 초빙 강사 아주 유익한 말씀도 해주시고 민방위 대원 아저씨들 낄낄대고 박수 치고 구청 직원 왈 "반응이 좋으시군요. 또 모셔야겠군요." 백태웅이도 잡혀가고 아, 박노해, 김진주 철창 속의 사람들 철창 밖의 사람들 아, 사람들... 작년에 만삼천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고 이천이삼백여 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죽고 천이백여 명의 농민이 농약 뿌리다 죽고 또 몇 백 명의 당신네 아이들이 공부, 공부에 치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죽고, 죽고, 죽고... 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압구정동에는 화사한 꽃이 피고 저 죽은 이들의 얼굴로 꽃이 피고 그 꽃을 따먹는 사람들, 입술 붉은 사람들 아, 사람들... 노찾사 노래 공연장엔 희망의 아침이 불려지고 비좁은 객석에 꽉찬 관객들 너무나도 심각하고 아무도, 아무 말도... 문승현이는 쏘련에 도착하고 문대현이는 퇴근하고 미국의 폭동도 잦아들고 잠실 야구장도 쾌청하고 프로 야구를 보는 사람들, 테레비를 보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해는 기울고, 한낮 더위도 식어 아드모어 공원 주차장 벤치에는 시카노들이 둘러앉아 카드를 돌리고 그 어느 건물보다도 높은 가로수 빗자루 나무 꼭대기 잎사귀에 석양이 걸릴 때 길 옆 담벼락 그늘에 기대어 졸던 노랑머리의 실업자들이 구부정하게 일어나 동냥 그릇을 흔들어댄다 커다란 콜라 종이컵 안엔 몇 개의 쿼터, 다임, 니켈 남쪽 빈민가 흑인촌 담벼락마다 온통 크고 작은 알파벳 낙서들 아직 따가운 저녁 햇살과 검은 노인들 고요한 침묵만이 음, 프리웨이 잡초 비탈에도 시원한 물줄기의 스프링쿨러 물 젖은 엉겅퀴 기다란 줄기 캠리 차창 밖으로 스쳐가고 은밀한 비벌리 힐스 오르는 길목 티끌, 먼지 하나 없는 로데오 거리 투명한 쇼윈도 안엔 자본보다도 권위적인 아, 첨단의 패션 엘 에이 인터내셔널 에어포트 나오다 원유 퍼 올리는 두레박들을 봤지 붉은 산등성이 여기 저기, 이리 끄덕 저리 끄덕 노을빛 함께 퍼올리는 철골들 어둠 깃들어 텅 빈 다운타운 커다란 박스들과 후진 텐트와 노숙자들 길 가 건물 아래 줄줄이 자리 펴고 누워 빌딩 사이 초저녁 별을 기다리고 그림 같은 교외 주택가 언덕 길 가 창문마다 아늑한 불빛 인적없는 초저녁 뽀얀 가로등 그 너머로 초승달이 먼저 뜬다 마켓 앞에서 식수를 받는 사람들 리쿼에서 개피 담배를 사는 사람들 버거킹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사람들 아, 아메리카 사람들 캘리포니아의 밤은 깊어가고 불 밝은 이층 한국 기원 코리아 타운 웨스트 에잇스 스트리트 코메리칸 오피스 주차장 긴 철문이 잠길 때 길 건너 초라한 아파트 어느 골목에서 엘 에이 한 밤의 정적을 깬다 "백인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미국에 와서 백인들을 잘 못 보겠어" (따당, 따당땅, 따당 땅 땅) 한국 관광객 질겁에 간 떨어지는 총소리 따당, 따당땅, 따당
육만 엥이란다 후꾸오까에서 비행기 타고 전세 버스 부산 거쳐, 순천 거쳐 섬진강 물 맑은 유곡 나루 아이스 박스 들고, 허리 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들 삼박 사일 풀코스에 육만 엥이란다 아... 초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까스 불에 은어 소금구이 혓바닥 사리살살 굴리면서 신간선 왕복 기차값이면 조선 관광 다 끝난단다 음, 음 육만 엥이란다 아... 초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 리빠나 모노 데스네 낚싯대 접고, 고무 장화 벗고 순천의 특급 호텔 싸우나에 몸 풀면 긴 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써비스 한 번 볼만한데 음, 음 환갑내기 일본 관광객들 칙사 대접받고, 그저 아이스 박스 가득, 가득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육만 엥이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나니나니나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워, 워......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음.....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 오른다. 하늘 높이 훨, 훨, 훨.....
RELEASES
CREDITS
Performed by 정태춘 & 박은옥 1기 (1984) - 정태춘 : 보컬, 기타, 하모니카 - 박은옥 : 보컬, 기타
레코딩 엔지니어 : 정도원 마스터링 엔지니어 : 고희정 기획사 : 삶의 문화 -------
작사 작곡 정태춘 편곡 함춘호, 정태춘 코러스 신지아, 김윤희, 유연이 기타 함춘호, 정태춘 아코디언 신지아 피아노, 신디사이저 김형석 드럼 배수연 베이스 기타 김현규 하모니카 정태춘 해금 우종양 구음창 이명국 장고 김상철 풍물 중앙대학교 '가운데' 녹음 정도원, 박주익 효과 박용규 마스터링 고희정 사진 김승근 디자인 P & T 진행 김영준
[대중음악 100대 명반]63위 정태춘·박은옥 ‘92년 장마, 종로에서’
입력: 2008년 04월 10일 17:29:46
ㆍ투쟁이 사라진 시대 쓸쓸한 관조
얼마 전 보게 된 쿠바 음악다큐멘터리에서 현지 힙합밴드인 ‘오요 콜로라요’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들의 말. “우리는 사랑을 노래한다. 증오도 노래한다. 전쟁이나 평화도 마찬가지다. 노래는 이 시대에 대한 증언이자 사회비평이다. 우리는 시대의 역사를 음악으로 남기려 한다.” 잊고 있었던 노래의 기능에 대한 당연한 되새김이었다. 그리고 문득, 정태춘이 떠올랐다.
정태춘,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1992년 대한민국의 풍경을 음악적 리얼리즘으로 정밀하게 그려낸 앨범이다. 음유시인에서 현장시인이 됐던 그들이 투쟁의 거리...